영화는 사건이 모두 벌어진 이후의 이야기다. 아이는 이미 유괴됐고 삶은 이미 파괴됐다. 촌스러운 안경을 끼고 한 손에 납치범이 요구한 돈가방을 든 채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던 목사 주영수는 유괴된 아이가 끝내 돌아오지 않자 신도, 삶도 버린다. 지난 1일 개봉한 영화 '파괴된 사나이'는 한 남자가 삶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힘든 일들을 모두 겪게 만드는 잔인한 영화다. 이 일을 고스란히 겪는 사람은 배우 김명민(38ㆍ사진)이다. 지난해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루게릭 병 환자를 맡아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던 그는 이번엔 목사로서 신을 버리고, 의학도로서 신념을 버리며, 사업가로서 사업을 버리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버리고 급기야 자신을 버리는 처지에 놓인 그야말로 '파괴된'역을 맡았다. 어쩌면 '내 사랑 내 곁에'에서 겪은 '신체적 고통'보다 더한 고통일 수도 있다. "연기는 어차피 다 힘든 거죠."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명민은 왜 자꾸 힘든 역만 맡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맡은 인물들이 파국으로 치닫는 캐릭터라 더 힘들거라 생각하는데 어차피 연기는 그 인물이 되기까지 나를 버리는 겁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그에게 그래도 배우가 배역과 똑같아질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배우는 그 사람(배역)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도덕적으로 위배되는 부분만 없다면" 이라고 답한다. 그의 말처럼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PC방에서 밤을 새며 납치범과의 접선을 기다리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실제로 사흘 밤을 지새웠다."제가 밤을 새지 않고 연기를 한다면 잠을 못 자며 납치범을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을 연기하기가 어려울 거에요. 밤을 새지 않고도 모두 표현해낼 '스킬'을 타고난 연기자가 있다면 박수쳐줄 만 하지만 전 그렇지 못합니다." 실제로 김명민은 39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주일에 교회를 가는 기독교 신자이자 일곱 살 아들을 둔 아버지다. 극 중 딸을 잃은 목사 주영수와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그는 자신의 모습과 대입해 생각하며 연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연기는 철저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드라마'하얀 거탑'에서 주목받고'베토벤 바이러스', '불멸의 이순신' 등에서 모두 '리더'역을 맡았던 그는 아직도 항상 수건으로 목을 두르고 잔다고 말했다. 목을 쓰는 직업이기 때문에 목 관리가 중요하므로 15년 이상 이어온 당연한 습관이라고 했다. 한마디 한마디에서 매번 너무나 당연한 듯 몸을 바쳐 연기하는 이유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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