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동구에 홀로 사는 직장인 이상민(32)씨는 지난해 술 먹을 일이 많았다. 의류업체를 다니는데 지난해 여름시즌은 세월호 사태로, 겨울은 불경기에 따뜻한 겨울까지 겹쳐 의류매출이 떨어지며 실적이 팍팍해졌다. 업무압박에 시달리다 늦은 퇴근 후 동료들과 소주 한 잔씩 하는 간단한 술자리는 늘었다. 소주1병에 맥주2병이 공식인 소맥(소주+맥주)도 얇아진 지갑 탓에 안 먹는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안주로 끼니를 때운다. 이러다 보니 점심을 제외하고는 밥 먹을 일도 줄었다.
이씨는 "경기는 죽었다는데 회사는 실적을 원하고 스트레스는 쌓이니 간단한 술자리만 늘어난다"며 "밥은 안 먹고 속병만 늘어가는 기분"이라고 전했다.
우리 국민들이 지난해 밥은 덜 먹고 소주는 더 마신 것으로 나타났다. 가정에서 먹는 밥쌀용 쌀 소비가 매년 늘어가는 가운데 지난해에는 6년 만에 햇반 등 즉석밥에 사용되는 가공용 쌀 소비마저 뒷걸음질 친 것이다.
13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 2009년 우리 국민 1인당 연간 가공용 쌀 소비량은 5.6㎏에서 2013년 9.2㎏까지 매년 늘었다. 하지만 지난해 가공용 쌀 소비가 1인당 8.9㎏을 기록해 6년 만에 줄었다. 반면 쌀 가운데 소주 원료인 주정용으로 쓰이는 쌀 소비는 다시 증가했다. 지난해 주정용 쌀 소비는 7만8,000톤으로 2013년(5만5,000톤)보다 42%나 늘어났다.
주정용 쌀 소비가 늘어난 것은 소주 판매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통계청과 신영증권의 분석에 따르면 전국 주류업체의 소주 판매량은 2013년 12억4,200만ℓ로 2012년(12억8,000만ℓ)보다 2.9% 줄었다가 지난해 13억4,000만ℓ를 기록한 것으로 조사됐다. 소주 판매가 13억ℓ를 돌파한 적은 지난해가 처음이다. 소주 판매량 증가에 소주에 들어가는 주정도 2013년 3억300만ℓ에서 지난해 3억2,400만ℓ로 증가했다.
지난해 소주 판매량이 증가한 것은 불경기의 영향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4·4분기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0.4%를 기록해 9분기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는 4분기 연속 0%대 성장을 하며 경기에 대한 심리가 얼어붙었다.
2013년 '소맥' 열풍이 시작되며 소주 판매량이 일시적으로 줄기도 했다. 하지만 불경기는 '소주'만 먹는 사람이 늘렸다는 분석이다. 한주성 신영증권 주류담당 연구원은 "불황에 사람들이 몇 병을 동시에 시키는 소맥 대신 싼 술을 찾으면서 지난해 소주 판매량이 늘어난 것이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국내 대형 주류업체의 한 관계자도 "지난해 소주 판매량이 전년에 비해 5% 정도 늘었다"며 "불경기를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체감하면서 소주 소비가 증가해 업체 간 마케팅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들은 지난해 육류도 소·돼지고기보다 상대적으로 싼 닭고기를 많이 찾았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시판을 위한 소고기 도축 수는 104만마리로 2013년(107만마리)에 비해 2.89% 줄었다. 소고기는 특히 9월 이후 4개월 연속 도축 수가 급감하는 상황이다. 돼지고기도 지난해 1,569만마리를 도축해 전년(1,613만마리)보다 2.74% 감소했다. 하지만 닭고기는 8억8,532만마리가 도축돼 전년(8억216만마리)보다 10.37% 늘었다.
농식품부의 한 관계자는 "가공용 쌀 소비가 감소한 것은 1인이나 2인 가구의 즉석밥 소비가 줄었다는 의미"라며 "불황에 따른 소주 판매가 늘어나 주정과 닭고기 소비가 느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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