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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절도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은 A씨는 감형을 받기 위해 항소를 결심하고 B법무법인을 대리인으로 지정해 착수금 500만원을 지급했다. 하지만 소속 변호사가 제출시한을 훌쩍 넘어 항소이유서를 낸 탓에 항소는 기각됐고 A씨는 꼼짝없이 2년형을 살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A씨는 분한 마음에 변호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법원은 "B법무법인은 총 3,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8부(여미숙 부장판사)는 "항소이유서 제출기한의 준수는 형사 항소심 사건 처리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라며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변호인 측의 과실이 매우 크고 원고들의 정신적 손해도 매우 크다"고 판결했다.
C씨는 소유하고 있던 땅의 매매대금을 받는 과정에서 D법무법인을 내세워 9억7,000만원 상당의 약정금 청구소송을 냈다. 그러나 해당 법무법인의 사무장과 담당 변호사는 C씨의 명확한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상대방과 합의를 한 후 소를 취하해 버렸다. 로펌 측은 "의뢰인이 사건이 빨리 정리되길 바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6부(정효채 부장판사)는 "합의가 없었다면 원고가 얻었을 채권금액과 그 동안 지연이자를 합쳐 총 12억7,0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하며 D로펌에도 80%의 책임이 있다고 봤다. 해당 법무법인은 출자총액이 1억원에 불과한 상법상 합명회사이기에 변호사법에 따라 나머지 손해배상액은 구성원 변호사 모두가 연대 부담하게 됐다.
5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변호사의 과실이나 불성실 변론 등을 이유로 소송의뢰인들이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재판부가 인정하는 정신적 피해에 따른 손해배상액도 고액화되는 추세다.
법조계에서는 이 같은 추세가 앞으로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하고 있다. 한 대형로펌 관계자는 "사회가 복잡해져 사건 규모가 커지고 내용도 어려워지는 반면 의뢰인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변호사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손해배상 소송이 많은 미국 등에서는 변호사 상대 소송만 전담으로 하는 변호사ㆍ로펌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실제 소송의뢰인들이 변호사의 법률서비스에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 접수된 변호사 상대 진정사건만 해도 지난 2006년 59건에서 2010년과 2011년 각각 420건을 웃돌며 7배나 늘어났다.
그러나 법률소비자들이 변호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를 해도 피해액을 제대로 보상 받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다. 국내 소형 로펌이나 개인변호사 대부분이 배상책임에 대한 별다른 준비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현실적인 대비책으로 보험이 거론되지만 국내 변호사 중 배상책임 보험에 가입된 비율은 20%도 채 안 된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변호사책임보험 전문중개회사 록톤컴퍼니즈코리아의 윤원 팀장은 "활동하는 변호사가 1만여 명에 달하는데 전체적인 보험 가입자 수는 법인 등을 포함해도 2,000여명 수준에 불과할 것"이라며 "비슷한 전문직종인 회계사들의 보험 가입률이 90%를 넘는 것과 비교해 매우 저조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현실은 국내 법이 법인(유한회사 등)에 한해서만 일정 이상의 준비금을 적립하게 하거나 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있는 상황과 관련이 깊다. 개인변호사나 개인변호사들의 단순 결합으로 볼 수 있는 합명회사 등에는 이 같은 배상위험에 대한 준비를 의무화하지 않은 셈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법인의 경우 출자총액 한도까지만 책임지므로 보험 가입 등을 의무화했지만 개인의 경우 무한책임을 지울 수 있기에 보험 가입은 본인의 자율 판단에 맡긴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국내 법률시장은 이 같은 합명회사 형태의 소형 로펌과 개업한 개인변호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개업하는 모든 변호사들은 배상책임보험 가입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외국 사례를 살펴봐도 독일의 경우 의사, 변호사는 직무규정에 전문직업인 배상책임 보험에 가입할 것을 명시하고 있고 미국 역시 주에 따라 배상책임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있는 곳이 많다.
업계 한 관계자는 "아직도 변호사들은 과실에 따른 의뢰인의 정신적 피해 등을 인정하지 않던 과거의 판례만을 떠올리고 있지만 최근 법원은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의 과실로 인한 책임을 엄격하게 인정하고 있다"며 "배상보험 등의 안전장치가 없는 한 과실소송에 피해를 입은 의뢰인들이 손해를 보상받는 과정에서 또 다른 고통을 겪는 2차 피해도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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