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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0대를 넘긴 중장년층에게 서커스는 단순한 공연을 넘어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어린시절 아련한 추억의 한 장면이다. 명절이나 5일장이 서는 마을에 서커스단이 오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신이 나곤 했다. 풍물패의 흥겨운 가락에 맞춰 공중 곡예, 접시 돌리기, 외발 자전거 타기 등 갖가지 진기한 묘기와 신기한 곡예가 펼쳐질 때마다 탄성과 박수가 절로 터져나왔다. 설을 며칠 앞두고 8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동춘서커스단을 이끌고 있는 박세환(65) 단장을 만났다. 박 단장에게 지난 한해는 우여곡절의 시간이었다. 경제 위기와 신종 플루로 경영난이 가중되자 지난해 11월 15일자로 서커스단의 문을 닫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벼랑 끝에 서자 의외로 길이 나타났다. 한국 유일의 동춘서커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국민들의 격려와 지지에 힘입어 지난 해 12월 19일부터 김포실내체육관을 빌려 다시 공연을 재개했으며 오는 3월15일까지 수원 장안문 빅탑극장에서 하루 3차례씩 공연한다. -동춘서커스단의 문을 닫는다고 선언하면서 무척 힘드셨겠습니다. "빚이 5억원이 넘었고 단원들 월급도 제대로 못 주는 상황이었지요. 어떻게든 끌고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수많은 네티즌, 관객들이 인터넷 홈페이지와 전화를 통해 만류했고 때마침 노동부와 '사회적 일자리 창출 업무 협약'을 맺어 단원 12명이 1인 당 84만원을 지원받게 되면서 해체 고비를 넘기고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어요. 용기를 내 김포실내체육관에서 공연을 재개했는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물 밀듯 모여들어 주말엔 1,000개가 넘는 객석이 꽉 찰 정도였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올 연말쯤에는 빚을 갚고 단원들에게 월급도 제대로 줄 수 있을 것으로 박 단장은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박 단장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무겁다. 바로 서커스아카데미가 전무할 뿐아니라 상설극장 하나 없는 한국 서커스의 현실 때문이다. -한국 서커스 산업의 현실이 어떤가요.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에 서커스의 명맥을 잇기 위해서는 외국처럼 유소년 때부터 교육시킬 수 있는 서커스아카데미를 둬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대안이 나오지 않고 있어요. 태양의 서커스나 볼쇼이 같은 외국 서커스를 보고 잘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동춘서커스 공연을 본다면 그런 말을 절대 못할 겁니다. 100개가 넘는 상설극장을 두고 있는 중국처럼 우리나라도 서커스 산업을 키우기 위해선 대도시에 3~4개 상설극장이 있어야 계절에 상관 없이 공연할 수 있습니다." 동춘서커스단은 일본 서커스단에서 활동하던 동춘 박동수 선생이 1925년 30명의 조선인을 모아 창설했다. 일제 식민지의 서민들은 아찔한 공중 곡예와 신기한 마술쇼에 열광하며 애환을 달랬다. -서커스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경주고 1학년에 재학중이던 59년 경주에 서커스단이 와서 공연했는데 너무 멋있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동춘서커스를 찾아갔습니다. 노래에 자신이 있어서 가수를 지망했는데 3개월간 연습생으로 대기했지요." 그의 조부는 2대 국회의원이자 경주 지역에선 유지로 통하던 고 박화준 씨. 종가집 장손인 박 단장이 서커스단에 입단하겠다고 하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노래하거나 춤을 추면 딴따라 혹은 광대짓을 한다며 업신여기던 시절이었어요. 어머니한테 빨래 방망이로 숱하게 얻어맞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선 호적 판다고 으름장을 놓으셨지만 서커스에 푹 빠진 청춘을 어떻게 할 수 없었지요." 국내 서커스 공연의 전성기는 지난 55년~72년까지이다. 가수, 코미디, 배우 등 예능에 재질이 있는 청춘들은 모두 서커스단으로 몰려들었고 동춘은 서커스 열풍을 선도했다. 그가 동춘에 입단했을 때 이미 허장강, 서영춘, 배삼룡, 이주일, 이봉조 등이 동춘을 거쳐간 뒤였다. 그러다 서커스단이 충격을 받은 것은 텔레비전의 등장이었다. 방송국들은 서커스단에서 키워놓은 배우, 연주자, 사회자 등 우수 인력들을 빨아들였다. 지난 72년 4월 TV드라마 '여로'가 방영되면서부터는 서커스단에 결정적인 위기가 왔다. 저녁 무렵 공연장에 와야 할 손님들이 삼삼오오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면서 관객들이 급감해 전성기 때 20개에 달하던 서커스단 중 살아 남은 것은 동춘을 포함해 4개에 그쳤다. 동춘이 비틀거리며 매물로 나오자 그는 동춘을 인수했다. "서커스 단원으로 생활하면서 스타가 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침 부산극장의 선전부장 자리로 옮겨 돈을 많이 모았습니다. 그러다 지난 78년 9월 태풍으로 인천 간석동에서 공연중이던 동춘서커스 빅탑이 무너지고 창단주의 아들 박영조 씨가 동춘을 매물로 내놨다는 소식을 접했지요. 동춘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 안 된다는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 당시로는 거금인 1,800만원에 80여명의 동춘단원을 인수했어요." 박 단장이 인수한 후 동춘서커스단은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진행하는 축제에 빠짐 없이 초청받아 공연할 정도로 인기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위기는 또다시 찾아왔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인해 빅탑, 조명, 음향기기 등이 모두 날아가 20억원의 재산 피해를 입은 것이다. "정말 눈앞이 캄캄했지요. 그렇게 손해를 보면서 빚은 쌓여만 가더군요. 지난해엔 신종 플루와 경제 위기로 지방 축제들이 무더기로 취소되면서 공연도 제대로 못하게 돼 문닫겠다는 결심까지 한 겁니다." 벼랑 끝에서 간신히 살아난 동춘에 올 봄에는 따뜻한 소식이 이어졌으면 하는 게 박 단장의 바람이다. 그는 한국방문의 해를 맞아 우리나라도 외국처럼 서커스를 관광 상품으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외에 가면 관광 코스에 서커스 관람이 필수로 포함되는 것처럼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가 담긴 서커스를 관광 상품으로 육성시켜야 한다는 것. "제주도에서는 서커스 공연이 상시적으로 열리지만 100% 중국인 곡예사로 우리 서커스 공연이라고 할 수 없어요. 한국에 관광 와서 중국 곡예를 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는 거지요. 서커스에 대한 철학이나 사명감조차 없이 상업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서커스 공연을 관광자원화하려면 우리만의 정서와 문화를 잘 녹여낼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제주도의 경우 해녀를 이미지화한 공연을 넣는 등 예술적으로 우리 것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박 단장은 "정부에서 단 3년만이라도 서커스를 집중 지원하면 동춘서커스를 세계적인 서커스로 만들어낼 자신이 있다"며 서커스 부활을 위해 정부 정책과 국민적인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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