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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온 요즘 한 교육업체에는 전화가 빗발친다. 가장 자주 받는 전화는 수시 면접이나 논술 예상 문제를 뽑아달라는 것. 예년 같으면 수능 관련 상담이 줄을 이었겠지만 일부 학부모들은 수능이 끝난 주말에 예정된 고려대 '학교장추천전형' 면접 등 주요 대학 수시 일정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
9일 교육업계 등에 따르면 입시 체제 변화 등으로 수능을 대하는 입시생과 학부모들의 모습이 예전과는 달라지고 있다. 서울의 한 학원 관계자는 "대학의 수시 선발 비율이 정시 선발 비율을 넘어서면서 수능 또한 여러 전형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며 "특히 상위권 학생일수록 수능 점수에 관계없이 수시로 대학 갈 길을 찾는 학생이 많다"고 밝혔다.
서울 강남의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김모(18)양의 반에는 최근 고려대와 한양대, 가천대 등 일부 서울·수도권 대학의 수시 전형 최종 합격자 발표가 있고 나서 '대학생' 친구가 몇 명 생겼다. 아직 한 반에 네다섯 명에 불과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흐트러졌다. 학생부 종합전형 등에 지원해 수능 점수는 합격 커트라인만 넘으면 되는 친구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김양은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는 수능으로 대학가는 건 '로또'라고 한다"며 "잘 하는 친구들도 수능에 목숨 걸기보다는 수시로 대학 가려고 2학기 때 이것저것 서류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능만 준비하면 낙오자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김양은 "등급 컷만 맞추면 되는 친구도 있고 다들 상황이 달라 함께 예전보다는 수능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수능을 일 년 앞둔 고2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서울 동작구의 한 고교에 재학 중인 고2 김모(17)군은 "정시로 대학가는 게 제일 예측이 어렵다고 들었다"며 "학생부와 논술 중심으로 준비하고 수능은 등급 컷 받을 것만 염두에 두고 전체 중에 50% 정도의 중요도만 두고 있다"고 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2015학년도 대입전형 시행계획에 따르면 전국 198개 대학 정시 선발 비율은 36%로 이 중 실기 위주 선발 등을 제외하면 '수능 점수로 선발하는 경우'는 전체 정원 중 31.6%에 불과하다. 2016학년도에는 수능 위주 선발은 28.8%에 그쳐 수험생 네 명 중 한 명만이 수능점수만으로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입시가 수능 일변도에서 수시 등으로 집중도가 달라지다 보니 먼저 변화를 겪는 건 교실이다. 3학년 2학기가 시작되는 9월부터 학교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수시에는 학생부가 3학년 1학기까지만 반영되기 때문에 1학기까지 열심히 수업을 듣던 학생들도 2학기가 되면 개인 공부를 시작한다.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고3 학생을 지도하는 윤모(35) 선생님은 "그나마 언어, 수리, 외국어처럼 기본 과목은 나은 편이지만 수시 합격에 있어 최저 등급에 들어가지 않는 과목은 대놓고 다른 공부를 한다"며 "당장 선생님들의 고민은 수능 끝나고 빡빡한 수시 일정 때문에 아이들을 어떻게 학교에 나오게 할지가 관건"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수능의 중요도가 줄어들면서 매년 수능 시험장 앞에서 벌어지던 후배들의 고사장 응원 문화 또한 달라지고 있다. 일부 학교에서는 고사장 응원 지원율이 떨어지자 봉사활동 4시간을 주고 지원자를 뽑기도 했다. 올해 선배들을 응원하러 고사장 응원을 가야 하는 전모(17)양은 "지난해에는 전통이라고 해서 응원했는데 수능으로 대학가는 선배들도 많지 않은데 유난스럽게 응원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참석 안 했다고 안 좋은 소리 들어서 가긴 간다"고 했다.
30년 가까이 교편을 잡은 서울 서초구의 한 선생님은 "학교에서도, 학생들도 수능 전 출정식, 후배의 응원 등 전통을 보존하려고 하지만 아무래도 1993년 수능이 처음 도입된 때에 비해 수능의 위상과 지위가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임성호 하늘교육 대표는 "수시 지원이 수능 전에 집중되면서 자소서 등 서류준비와 논술 준비로 고3 2학기 수업이 거의 마비가 된다"며 "상위권 학생들부터 수능에서 이탈하다 보니 수능으로 대학을 가는 학생들이 오히려 박탈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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