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르신 안에 계세요? 농약안전보관함 점검 나왔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19일 강원도의 한 산골 마을 외딴집. 지나다니는 사람은 물론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도 눈에 띄지 않고 오로지 적막함만 가득한 이곳에 녹색 조끼를 입은 횡성군 보건소 직원들이 찾아왔다. 오랜만의 인기척이 반가웠는지 이 집 안주인 전모(63)씨는 밝은 표정으로 손님들을 맞았다.
전씨를 따라 마당 옆 창고로 들어가니 농기구와 비료 자루가 널려 있었고 한가운데 '농약안전보관함'이라고 적힌 큼직한 노란색 철제 수납장이 놓여 있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열쇠를 가져온 전씨가 보관함의 문을 열자 층별로 가지런히 있는 제초제와 살충제 등을 볼 수 있었다. 신정인 보건소 주무관이 점검표를 펼치고 보관함이 제대로 활용되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는 동안 전씨는 "정리하기 편하다" "농약이 함부로 나뒹굴지 않아 좋다"며 연신 만족감을 드러냈다.
10여분 남짓한 시간 전씨와 보건소 직원은 서울에 사는 손주 소식부터 마을 부녀회 돌아가는 얘기, 읍내에 새로 생긴 마트 위치까지 이야기보따리를 한 아름 풀어냈다. 다른 집도 방문해야 하는 신 주무관이 한 달 뒤에 또 오겠다며 인사말을 건네자 전씨는 그냥 보내기가 못내 아쉬운 듯 대문 밖까지 나와 배웅했다.
2012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61세 이상 노인의 자살기도 방법 중 농약음독은 39.6%에 달해 약물음독(43.8%)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특히 비수도권 지역의 농약음독 비율은 21.4%로 수도권(4.0%)의 다섯 배를 넘었다.
삼성생명과 교보생명·한화생명 등 18개 생명보험사의 출연기금으로 운영되는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한국자살예방협회와 함께 농촌 맞춤형 자살예방 사업으로 농약안전보관함을 보급하고 있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강원도 화천과 속초, 경기도 화성과 이천, 충남 공주와 태안, 인천 강화군 등 33개 마을 1,545가구에 보관함이 설치됐고 올해는 강원도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850가구에 추가로 보급할 계획이다.
보관함은 농약을 잠금장치가 있는 곳에 몰아둠으로써 충동적으로 농약을 먹으려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생각할 시간을 주고 농약을 피로회복제나 부침가루 등으로 잘못 알고 먹는 것을 막아준다. 또 주기적으로 지역 보건소 직원이 활용방법을 지도하고 마을 이장 등은 지킴이로 임명, 보관함 설치 가정을 둘러봄으로써 유대관계를 강화해 위기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빨리 발견하는 기능도 있다. 한국자살예방협회장을 맡은 안용민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농약을 눈에 보이지 않는 데 두는 식으로 자살방법을 차단하는 게 가장 확실한 예방책"이라며 "관계자들이 집집마다 찾아가 얘기를 나누고 정신건강을 챙기는 것도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유석쟁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전무는 "지금은 민간에서 보관함을 보급하고 있지만 1~2년 뒤 실제 성과가 입증되면 정부 정책에 반영해 전국에 이 사업이 확대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