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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Story] 청소부서 로펌 수장으로… '인생역전'

온기 남은 연탄재 껴안고 새벽 추위 견뎠던 기억 아직도 선해



가정형편 탓 중학교 진학 포기
심부름꾼·청소부·신문배달… 초등학교 나온후 안해본 일 없어

검정고시로 23세에 대학 입학
고학하며 법조인꿈 키워 29세에 사법고시 합격

성공하기까지 많은 도움 받아 부채 갚으려 공익소송에 집중
사회적 약자 도와 주며 살 것


박영립(62·사진)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의 과거는 한마디로 역경 극복의 역사라 할 만하다. 초등학교만 나와 검정고시로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고 사법고시에 합격할 때까지 심부름꾼에서부터 버스 계수원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가난이라는 큰 강을 직접 넘어서면서 10대 로펌 대표변호사까지 올라 법조계에서도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 받는다. "아휴, 말도 못했죠. 스무 살에 검정고시 붙는다고 박사나 교수가 될 것 같으냐, 비 명문대에서 무슨 사법고시를 보느냐는 등 비아냥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반대하는 사람들 덕분에 오히려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절박함과 간절함을 갖고 공부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강남구 아셈타워에서 만난 박 대표는 자신의 이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970년대 초까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전라남도 담양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가난 때문에 모든 게 늦었어도 공부를 하겠다는 꿈을 버리지는 않았다. 어렵게 성공한 덕에 공익소송에 대한 관심도 커 그는 대표변호사보다 공익소송 변호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박 대표는 이에 대해 "공익소송은 법조인이 된 소명인 동시에 어려울 때 도와준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부채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음식점 종업원에서 공장 청소부, 신문 배달 등 안 해본 일 없어=13세의 나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박 대표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하지만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면서도 교복을 입고 다니는 또래를 볼 때면 부러움에 눈길을 떼지 못했고 결국 광주에 올라가 한 민중당 의원 사무실의 심부름꾼으로 취직했다. 그 의원이 당선돼 서울로 가면 야간학교에서라도 학업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꿈도 잠시, 민중당과 신한당이 신민당으로 통합되면서 일자리를 잃게 된다.

실패에 굴하지 않은 그는 곧 대바구니 장수인 친척을 따라 서울로 향한다. 이 서울행이 진정한 고난의 시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 여관에 취직했지만 실수를 해 3개월 만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쫓겨났다. 그는 "새벽 내내 추위에 덜덜 떨다가 발견한 연탄재에 온기가 남아 있어 그걸 껴안고 추위를 견뎠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며 "안도현 시인이 '너에게 묻는다'는 시에서 연탄재의 온기를 말했는데 실제로 직접 경험해봤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여관에서 쫓겨난 뒤에는 음식점 종업원에서 양복점 공원, 공장 청소부, 공사 현장 일용직, 신문 배달, 애견병원 청소부, 버스 계수원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초졸 신분으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탓에 지금도 아르바이트 구인 광고를 보면 눈을 떼지 못한다고 박 대표는 설명했다.

◇23세 늦깎이로 대학에 입학=그가 인생을 바꾸게 된 계기는 동대문시장의 한 이불가게에 정착하면서부터다. 주변 가게주인들은 세무서 공무원들에게 식사나 차를 대접하기 바쁜데 그가 일하던 곳의 사장은 그런 것을 전혀 하지 않았다. 혹여나 피해를 보지 않을까 걱정돼 이유를 묻자 사장은 그에게 "내가 상고를 나와 장부를 직접 정리하고 그에 맞춰 세금을 잘 내는데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답했다. 사장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그는 9개월 만에 중학교 과정을 끝내주겠다는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일하던 가게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오전에는 학원을, 오후에는 가게에서 일하는 생활이었다. 몇 개월치 월급인 학원비와 책값이 만만치 않았지만 중졸이 되고 싶은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학원 수업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첫 수학 수업에 들어갔는데 X와 Y를 쓰면서 방정식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며 "첫 수업이라 그러겠거니 하면서 하루를 더 들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환급을 해달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학원은 환급을 거부했고 이때부터 박 대표는 아예 문제부터 답안까지 모두 외우는 방법으로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듬해 고입 검정고시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한다. 그의 뛰어난 성적에 학원은 잡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대입 검정고시 과정의 수업료를 지원했고 박 대표는 대입 검정고시도 단번에 합격한다. 이후 그는 대학 입학에 도전했고 첫 학기 장학금을 받으며 숭전대(현 숭실대) 법경대학에 수석 입학한다. 13세 이후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그가 꼬박 10년 만인 23세에 대학생이 된 것이다.

◇우연히 다가온 '법조인의 꿈'=법경대에 들어갔지만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은 없었다. 경제·경영·무역·법학의 네 학과가 모여 있던 법경대학에서 그가 희망했던 학과는 경영학과였다. 취직이 잘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월부책 장사와 검정고시 학원 강사, 과외 등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다음 학기를 다닐 수 없는 현실은 그를 더욱 채찍질했다.

법조인을 꿈꾸게 된 것은 졸업을 위해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던 채플 수업에서였다. 박 대표는 "채플 수업에서 소명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나의 소명은 뭘까'라는 생각을 했다"며 "이후 도서관에서 사법고시에 관한 책을 읽던 중 '늦게나마 공부를 한 게 법조인이 되라는 소명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사법고시에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법학과를 선택했고 29세에 23회 사법고시에 합격한다.

◇'공익소송'은 그간 받은 도움 갚기 위한 것=박 대표는 현재의 그를 만든 것은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동대문시장의 가게주인이 검정고시 학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거나 학원이 장학금을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현재의 자신은 불가능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 주변의 많은 도움을 받아 부채의식을 늘 가지고 있다"며 "공익활동에 나서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박 대표는 소록도 보상청구 소송 변호단의 한국 대표로서 일제강점기 시절 소록도에 강제격리 수용된 한센병 피해자들을 대리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청구 소송을 제기해 현재까지 561명이 약 1억원의 보상을 받게 했다. 그는 한센 인권 변호단 단장으로서 강제 단종(정관수술)·낙태 피해를 본 한센병력자 600여명을 대리해 제기한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현재까지 480여명에 3,000만~4,000만원을 지급하라는 보상 판결을 이끌어냈다.

그는 앞으로도 공익소송에 집중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한센병 소송 등 공익활동을 하게 된 것은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라며 "지금은 다행히 공익활동을 할 수 있는 상황에 있고 하고 싶어 시작한 공익소송 결과도 좋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He is…





△1953년 전남 담양 △1974년 대입 검정고시 △1980년 숭전대(현 숭실대) 법경대학 졸업 △1981년 23회 사법시험 합격 △1983년 사법연수원 13기 수료, 변호사 개업 △1987년 숭실대 법과대학원 △1993~1995년 서울지방변호사회 총무이사 △1997~2003년 법무법인 화백 △2000년 단국대 법과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1년 서울대 전문법학연구과정(금융거래) 수료 △2001~2003년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2003~2005년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 △2003년~ 법무법인 화우 △2004년~ 소록도 한센병 보상 청구소송 한국변호단 단장 △2005년~ 한센 인권 변호단 단장 △2013년~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







사시는 없는자의 희망사다리… 계속 유지돼야



"고 노무현 대통령이나 저처럼 여러 형편 때문에 정규 대학을 못 가는 사람이 분명 있어요. 사법고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길이기 때문에 반드시 존치돼야 합니다."

박영립 대표변호사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과 사법고시의 공존을 주장했다. 박 대표는 "로스쿨 제도가 이미 도입된 상황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면서도 "사법고시를 전면 폐지하기보다는 변호사 예비시험 등의 제도를 통해 법조인이 될 수 있게 최소한의 제도를 남겨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법고시가 희망의 사다리라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저 같은 사람에게 사법고시는 희망의 사다리였는데 그걸 치워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며 "여러 사정으로 로스쿨에 진학하지 못하거나 혼자 공부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사법고시는 다른 형태로라도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법고시 폐지로 인한 부작용도 지적했다. 그는 "사법고시가 폐지된다면 이미 사내 법무팀 등에 속해 있어 일정 수준 이상의 법률지식이 있는 사람도 로스쿨에 진학해야만 법조인이 될 수 있다"며 "이는 교육과정이라는 특정 시스템을 통해 법조인을 양성하겠다는 로스쿨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박 대표 자신처럼 독학이나 기타 사회경험을 통해 법률지식을 쌓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문대학원이라는 특정 교육과정으로만 법조인을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사법고시를 검정고시에 비유하기도 했다. 자신처럼 정규 교육과정에서 낙오된 이들을 위한 것이 검정고시 제도인 것처럼 사법고시도 정규 교육과정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남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일반 교육과정에서 낙오됐던 제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검정고시 덕분"이라며 "가정형편이나 건강상 이유 등 각자 다른 이유로 시스템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사법고시와 같은 또 다른 길이 열려 있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송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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