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베어 요자페트(Israel Beer Josaphat)는 꿈이 많았다. 랍비였던 아버지가 15세 때 사망하자 그는 삼촌에게 은행 일을 배우고 독일이 낳은 대수학자 가우스를 따라다니며 과학지식도 익혔지만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대인이라는 제약 탓이다. 영국인 처녀와 29세에 결혼하기 직전 루터교도로 개종하며 얻은 독일식 새 이름이 율리우스 로이터(Julius Reuter). 영국인들의 ‘미스터 라이터’라는 빈정거림 속에 독일로 돌아와 출판사업과 서점업을 거쳐 독일 신문의 파리 통신원을 지내며 그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정보는 돈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뉴스 공급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그는 빈 틈을 찾아냈다. 독일과 프랑스-벨기에의 국경을 넘는 전신망이 연결되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한 그는 독일 전신망의 서쪽 종점인 아헨을 찾아 통신용 비둘기 조련업자와 만났다. 36세의 로이터가 전서구 45마리를 빌리는 계약을 체결한 1850년 4월28일은 차별화한 근대적 정보공급의 시발점이었다. 주가시세표와 뉴스를 달고 브뤼셸을 출발한 로이터의 비둘기들은 기차보다 4시간 빠른 2시간 만에 아헨에 도착했으니까. 로이터는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뉴스 공급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독일과 벨기에를 연결하는 전신망이 완성되자 로이터는 주저 없이 금융의 중심지인 영국 런던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런던에서도 그는 빨랐다. 이탈리아 통일전쟁과 링컨 대통령의 암살 등 굵직굵직한 특종도 날렸다. 뉴스의 수집과 전달을 체계화하고 자체 전신망 확충에 주력한 결과는 오늘날까지 로이터 통신의 명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창의력과 차별화는 로이터뿐 아니라 세계적 통신사들의 공통점이다. 한국에서는 법과 관습이 독점을 보장하지만.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