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동아시아에는 유구(琉球)라는 해양왕국이 있었다. 15세기 이후 통일 왕조를 이룬 유구는 영토가 넓지 않았고, 중국의 번속국(藩屬國)이기도 했고, 지금은 일본에 강제 병합돼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된 상태라 이 나라를 잘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래서 서러운 유구에, 더 슬픈 역사가 있다. 조선 인조 무렵 왜구가 유구를 침략해 왕을 납치해 갔고, 이에 유구 왕세자는 왕을 풀어달라며 보물을 싸들고 왜국으로 가던 중 제주 인근에 표류하게 됐다. 그런데 이들은 재난보다 더 무서운 탐관오리를 만나게 된다. 당시 제주 목사 이란이 표류한 배를 염탐하고는 보물이 탐나 왕세자 일행을 죽이고 만 것이다. 유구 왕세자는 죽음이 임박해 혈서로 "…제주 앞 바닷물은 도도하게 흐르고 남은 원한 선명하여 만 년간 오열하리"라는 시를 남겼다. 조선 후기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준 이 사건을 당대 지식인 김려(1766~1822)는 저서 '담정유고(潭庭遺藁)'에 '유구 왕세자 외전'으로 기록하며 "미안하오, 유구. 정말 미안하오. 유구 세자의 일이 슬프고 슬프구나"라며 논(論)했다. 이 부분을 두고 고전학자인 저자는 "과거사를 진심으로 사과하는 뜻에서 취해진 조처로 보인다"며 "조선에서 17세기와 18세기의 차이는 부끄러운 현재를 미안해할 겨를조차 없었던 생존의 시대와 부끄러운 과거를 미안해하고 윤리적으로 치유해나가는 문화의 시대라는 차이"라고 분석한다. 더불어 "지금 동아시아에 필요한 것은 이러한 '미안함'의 지성사적 전통들을 서로 공유하고 그 위에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한국 지성사 연구에 몰두해 온 저자는 앞의 내용을 포함해 1714년부터 1954년까지 쓰인 옛 지식인들의 글을 추려 읽기 좋은 해설과 함께 내놓았다. 시기별로 '18세기 지성사', '19세기 지성사', '전환기 지성사', '20세기 지성사'로 묶었다. 홍대용, 박제가 등 대표적 지식인뿐 아니라 오광운, 김려, 이상수, 김창희 등 덜 익숙한 문필가들의 글도 다수 포함됐다. 이들의 옛 글에 담긴 역사적 상황과 글쓴이들의 시대 인식을 현대로 끌어와 "변화의 흐름을 꿰뚫고 싶다면 전환기 고전을 읽으라"고 제안한다. 명청 교체기를 계기로 중국의 역사를 음양의 이치로 논한 18세기 지식인의 글부터 해방 후 제주 4·3 사건을 언급하는 20세기 학자의 비탄에 이르기까지 200년 가까운 시기의 문장들을 통해 현 시대의 화두를 곱씹게 한다.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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