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없이 애지중지 키운 딸이 10대 또래에게 강간을 당한 뒤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가해자와 맞닥뜨린 아버지는 이성을 잃고 순식간에 피해자의 가족에서 살인범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가해 소년을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선다.
지난 10일 개봉한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사적 복수를 위해 가해 소년 두식(이주승)을 찾아 나선 아버지 상현(정재영), 그리고 두식과 상현 두 사람을 추적하는 형사 억관(이성민)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우아한 거짓말' '한공주'와 함께 청소년 범죄와 처벌이라는 사회적 이슈에 다시 한번 불을 지피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딸을 잃고 본인의 인생도 잃어버린 아버지의 울분을 대신 토해주고 싶었다."
이정호(사진) 감독은 처음에 방황하는 칼날 연출 제의를 거절했었다. 원작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지만 해보겠다는 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너무 비극적인 소재잖아요. 혹시나 이 무거운 이야기를 함부로 대하게 될까 봐 걱정됐어요." 소설을 다섯 번 다시 읽고 나서야 생각이 바뀌었다. 영화 말미 상현과 두식이 강릉역에서 대치하는 장면을 끄적이고 있는데 찌릿한 느낌이 왔다. "상현이 '이런 놈(두식)이랑 같이 살 수가 없다'고 절규하는 장면을 쓰고 있었는데 제 입에서 상현의 대사가 절규처럼 튀어나오더군요." 그제야 '이 느낌이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언론과 관객에 소개되면서 이 감독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청소년 범죄 처벌수위'에 관한 것이다. 소재가 지닌 사회적 관심 탓에 개봉 전부터 '영화가 미성년자 범죄 처벌 강화를 주장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 이 감독은 "그저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관객들은 두식이를 욕하고 울분을 토하겠지만 이 분노는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걸치며 잊어버릴 것들"이라며 "그저 우리가 처한 현실이 어떤지를 보여주고 사적 복수에 대한 이성적·감성적 접근의 딜레마를 관객 스스로 목도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방황하던 칼날이 난마(亂麻)처럼 얽힌 영화 속 갈등을 해결하는 쾌도(快刀)가 되지 못했지만, 그래서 영화 속 억관과 관객들은 무기력함에 또 한번 좌절했지만 이것이 감독이 처음부터 의도했던 칼날의 모습인 셈이다.
영화에서 내리지 못한 답보다는 '답이 없는 현실'이 더욱 문제라는 게 이 감독의 생각이다. 그는 "청소년에 대한 성인 범죄자들의 형량도 낮은 상황에서 미성년 가해자만 엄하게 처벌하자고 하는 것도 모순이고 갱생을 위한 보호관찰 프로그램 역시 보호관찰관 1명당 담당 범죄자가 수백명이라 제대로 돌아가기 힘든 상황"이라며 "청소년 보호라는 취지만 있고 뒷받침할 제도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학교폭력을 피하려 범죄에 동조하는 민기가 더 악랄한 두식이가 되고 두식이는 10대들을 끌어들여 나쁜 짓을 하는 쓰레기 같은 어른이 되는 거죠." 먼 산을 보던 이 감독의 표정이 씁쓸하게 구겨졌다.
이 감독은 청소년 (성)폭력 등 또래 범죄를 소재로 최근 개봉한 영화들을 청소년들이 봤으면 하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방황하는 칼날과 한공주는 청소년 관람 불가다. 이 감독은 "영화 한 편을 보고 요즘 애들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또래 아이들이 무심코 한 행위가 어떻고, 방치된 피해자들의 고통이 어느 정도라는 것은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청소년 관람 불가라) 아쉬움이 크다"고 말끝을 흐렸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작은 깨달음은 줄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이 감독이 영화를 통해, 상현의 절규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게 이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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