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했다. ‘얼음을 잘라 더운 나라에 팔겠다고? 운송 도중에 다 녹아버리고 말 텐데….’ 그랬다. 1806년 2월, 천연얼음 80톤을 싣고 보스턴을 떠난 화물선이 2,400㎞를 지나 서인도제도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에 도착했을 때 남은 얼음은 20여톤. 그나마 원주민들은 신기하게 여길 뿐 용도도 몰랐다. 프레드릭 튜더(Frederic Tudor)의 첫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집에서는 늦었지만 학업에 나서라고 채근했다. 튜더는 보스턴 명문가 출신. 독립전쟁 때 워싱턴 아래에서 군 법무총감을 지낸 윌리엄 튜더의 3남으로 1783년 9월4일 태어난 그는 하버드대학 입학을 마다한 채 13세부터 장삿길에 나섰다. ‘얼음을 팔면 돈이 된다’는 확신에서다. 돈을 모아 회사를 세운 게 1803년. 양질의 천연빙을 구할 연못과 호수를 찾고 보관창고ㆍ화물선까지 준비한 첫 수출에서 그는 빚 4,500달러만 안았다. 튜더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사업을 늘렸다. 1810년 처음으로 이익 7,400달러를 올렸지만 빚은 9,000달러로 불어나 있었다. 채무자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연리 40%로 돈을 빌려 사업을 꾸려나갈 즈음 그는 마침내 길을 찾았다. 톱밥이라는 단열재를 찾아내고 새로운 채빙기술을 개발한 덕분에 1825년부터 돈방석에 앉았다. 유럽과 인도ㆍ싱가포르까지 전세계 53개국에 얼음창고를 깔고 연간 500만톤이 넘는 천연빙을 팔아 ‘얼음왕’으로 불렸던 그는 1864년 인생의 정점에서 숨졌다. 문제는 튜더 사후. 회사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값싼 인공제빙 기술을 외면한 채 천연빙 채집에 매달린 탓이다. 튜더의 성공과 형체도 없이 사라진 회사는 성공기업의 조건을 말해준다. ‘독창적 아이디어와 인내, 끊임없는 경영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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