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2년 8월24일 한중 수교 이후 양국 경협의 역사는 대기업의 발자취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수교 이후 2011년까지 한국 기업의 대중 투자액 368억달러 가운데 삼성ㆍLGㆍSKㆍ포스코ㆍ현대차 등 5개 그룹의 투자규모만 328억달러로 무려 89%에 달한다. 이들 기업이 지난 20년간 중국에 세워놓은 가전, 정보기술(IT), 자동차 공장 등의 생산기지는 협력업체의 동반 진출과 원부자재의 중국 반입을 유도하는 등 한국의 대중 수출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일등공신 역할을 하며 한국 경제성장을 주도해왔다.
하지만 한국 경제성장의 주춧돌이었던 한국과 중국 간 경제협력에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 고속성장하던 대중 수출이 올 들어 5월까지 전년 동기 대비 1.6% 감소했다. 중국 수입시장 점유율이 최근 2년 새 0.9%포인트 깎이며 세계 최대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에서 한국 상품의 경쟁력이 쇠퇴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박한진 베이징KOTRA 부관장은 "한국은 그동안 중국을 수출 전진기지로 바라보고 가공무역에 기반한 대중 진출을 해왔다"며 "이제는 중국의 내수 중심 발전 전략에 맞춰 한국 기업도 대중 진출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새로 짜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원부자재ㆍ부품을 들여와 중국 생산기지에서 조립해 제3국으로 수출하는 가공무역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는 것이다.
중국은 저임금에 기반한 수출주도 경제에서 벗어나 도시화, 근로자 임금 인상, 사회복지 기반 강화, 산업구조 고도화를 꾀하며 소비주도 성장을 가속화하고 있다. 정영록 주중 한국대사관 경제공사는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의 대중 수출이 급증하며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5%로 늘어났지만 중국을 경유하는 가공무역 수출을 제외하면 실제 중국 시장으로 들어가는 수출은 10% 수준에 그치는 실정"이라며 "한국 기업들은 근본적으로 중국 내수시장을 겨냥한 새로운 경영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중 수교로 한중 간 무역거래가 시작되던 1992년 한국의 대중 수출 상위품목은 철근ㆍ열연강판ㆍ가죽ㆍ냉연강판이었다. 허허벌판이던 상하이 등 동부 연안 개발을 위해 당시 중국은 한 푼의 외자가 아쉬웠고 산업개발을 위한 철강 등 기간 산업은 물론 가전ㆍIT 산업 등의 국내 토양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확 달라졌다. 2010년 기준 바오강ㆍ허베이ㆍ우한 등 중국의 철강 업체들이 세계 10대 철강사 중 6개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철강 시장은 공급과다 상태이고 TVㆍ냉장고ㆍ세탁기 등 가전 시장은 하이얼ㆍ하이센스ㆍ스카이워스 등 국내 토종업체들이 장악했다.
20년이 지나 올 들어 5월까지 수출 상위품목을 보면 액정디바이스ㆍ반도체ㆍ자동차부품 등으로 확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한국이 산업가치 사슬에서 한 단계 앞서 나가며 경쟁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지금 잘 나가는 LCDㆍ반도체 등에서도 중국이 막대한 연구개발 자금 및 인력 투입, 글로벌 기업 인수 등으로 하루가 다르게 기술격차를 좁혀오고 있기 때문이다. 20년 후에 한국이 중국에 어떤 투자를 하며 무엇을 팔고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그렇다면 중국의 내수주도 경제성장 등 경제구조의 질적 변화에 맞춰 한국 기업은 어떻게 대중 전략을 짜야 할 것인가. 기술ㆍ상품경쟁력 강화는 기본이고 중국 내수시장에 파고들 수 있게 철저히 현지화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와 관련, 박 부관장은 "일본의 소니ㆍ도시바ㆍ미쓰비시 등이 기술력만 믿고 현지화에 실패해 가전 시장에서 사라진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또 과거 한중 산업 간 교역에서 이제는 산업 내 협력으로 중국과의 상생발전 전략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이 철강ㆍ조선ㆍ가전ㆍIT 등에서 확실한 기술우위를 가졌을 때는 중국 정부의 투자 혜택을 받아가며 시장지배력을 넓힐 수 있었지만 지금은 경쟁우위가 모호해졌다.
이에 따라 유망한 미래 시장에서 양국 간 공동 연구개발, 공동 시장 개척 등을 통한 산업 내 협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조영삼 산업연구원 베이징사무소 대표는"중국은 전기자동차 등 글로벌 경쟁우위가 정해지지 않은 미래 유망 잠재시장에 엄청난 의지와 개발 의욕을 갖고 있다"며 "이 같은 미래 시장에서 한국이 중국과의 협력을 모색함으로써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가 창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중국 정부가 경제개발 및 내수확대를 위해 추진하는 농촌의 도시화에 주목해야 한다. 중국은 도시화를 통해 매년 1,30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인구로 전환되고 있으며 이는 인구 5만명의 신도시가 매년 250~300개 생겨나는 것과 같다. 정 공사는 "중국 경제의 특징은 도시화와 이에 따른 소비수요 확대로 요약될 수 있다"며 "이들 도시화 과정에서 생기고 있는 엄청난 내수시장을 어떻게 파고들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거대 중국 대륙의 특성상 성격이 상이한 다양한 시장이 존재하는 만큼 그에 맞는 투자전략을 취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김영삼 주중 한국대사관 국장은 "중국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여러 개의 시장이 존재한다"며 "예를 들어 대도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전역의 2ㆍ3선 도시에 대한 소비재ㆍ자본재 시장을 맞춤형으로 공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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