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가 발표한 정강ㆍ정책 개정안 초안은 예상대로 큰 노선변화를 웅변하고 있다. 복지ㆍ일자리ㆍ경제민주화가 차례대로 강령의 최전방에 배치됐다. 기존 강령에서 선두에 있던 활기찬 시장경제,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질서는 모두 전면에서 빠져 자기파괴적 한나라당의 재창조 기류를 상징하고 있다.
보수정당의 이 같은 하드웨어 쇄신이 얼마나 많은 국민의 공감을 얻을는지 그것이 관건이다. 물론 복지와 일자리 문제는 여야 막론하고 국가적 화두이자 시대조류인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한나라당이 강조점을 두는 것은 정당도 시대상황에 따라 변화해야 하는 유기체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많은 국민은 4년 전 한나라당 집권 당시 주창한 정책노선 또한 기억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것이 시장경제와 성장이다. 그랬던 구호가 이번에 온데간데 없고 대기업 옥죄기를 의미하는 경제민주화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한나라당의 보수노선에 표를 찍고 지금도 보수에 동감하는 많은 유권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운 대목이다.
한나라당의 정체성은 '보수'다. 보수의 우선가치는 자유와 시장경제ㆍ성장ㆍ안보 등이다. 시대에 따라 강조점은 달라질 수 있지만 기본철학은 유지돼야 한다. 이번 강령 개정안을 보면 한나라당이 진정으로 보수를 여전히 지향하는지 대체 알 수가 없다. 대한민국의 건전 보수층을 대변해야 할 정당의 정체성이 애매모호해지는 것이 아닌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집권 한나라당의 실패는 보수라는 기본가치가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다. 부도덕ㆍ무능력∙부정부패로 발생한 문제를 '이념과 정체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오판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히려 논의의 초점은 기본가치들이 왜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는지, 국민의 호응을 얻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지로 모아져야 한다.
우리나라도 저성장의 덫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장에 대한 강조는 필수적이다. 더욱이 보수정당이라면 성장은 언제든 우선과제로 삼아야 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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