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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게 형편 없네."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 순위에서 나란히 1, 2위를 차지한 디즈니의 '겨울왕국'과 픽사의 '토이스토리3'가 제작 초반 이런 평가를 받았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독설을 날린 이는 다름 아닌 두 회사를 이끌고 있는 사장이다.
픽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장을 겸임하고 있는 에드 캣멀은 "더럽게 형편없는 상태에서 괜찮은 상태로, 괜찮은 상태에서 훌륭한 상태로 작품을 개선하는 것이 경영진의 임무"라고 강조한다. 개선의 열쇠는 창의적 소통이다. 경영진부터 일반 직원까지 가감없이 작품 제작 과정과 스토리에 대해 아이디어와 견해를 던질 수 있는, 체계적인 피드백 시스템이 가동될 수 있는, 창의성이 흐르는 길을 터주는 것이야 말로 경영자가 해야할 일이라는 게 캣멀의 주장이다. 책은 캣멀이 픽사와 디즈니를 경영하며 겪은 다양한 경험과 시도를 소개하며 창의적인 조직문화 구축에 대한 아이디어를 전달한다.
캣멀은 픽사 성공 신화의 일등공신으로 '브레인트러스트 회의'를 꼽는다. 픽사 내 모든 제작진은 정기적으로 현재 작업 중인 작품의 진행상황을 브레인트러스트라는 내부 자문단에 공개하고 서로 열띤 피드백을 주고 받는다. 픽사 내부적으로 비평의 초점이 '만드는 사람'이 아닌 '작품의 질'에 맞춰져 있다는 인식이 정착돼 있기에 솔직한 소통이 가능하고 자연스레 집단창의성이 발산된다. 캣멀은 거의 모든 브레인트러스트 회의에 참석해 피드백이 솔직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때론 직원들과 토론을 즐기기도 한다.
픽사 신화를 일군 캣멀의 창의 경영은 디즈니의 부활도 이끌었다. 1994년 라이온킹 이후 흥행작 없이 16년을 슬럼프에 빠져 있던 디즈니. 캣멀은 2006년 픽사가 디즈니에 인수합병된 뒤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사장직도 맡아 픽사의 솔직한 소통 문화를 이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허구한 날 두드려 맞아 위축된 개와 같았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2006년만 해도 디즈니는 수직적인 직급 문화 속에 임직원과 현장 직원은 물론 현장 부서 간에도 단절이 심했다. 구성원들은 회의시간에 솔직한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고 경영진의 눈치만 봤다. 효과적인 피드백은 없었다. 캣멀은 '스토리트러스트'라는 스토리 개선 피드백 시스템을 강화해 스토리텔링 능력을 보완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의 전환이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해도 괜찮다'는 풍토를 정착시켜 실패에 대한 공포를 없애려고 했다." 회의에서 완성 직전의 캐릭터를 폐기하고 각본을 갈아 엎는 과감함이 깨어났고, 예상 못한 난관에도 외부 도움 없이 마감일을 맞추는 해결 능력이 생겼다. 그렇게 2008년 12월 애니메이션 '볼트'가 개봉했고, 관객과 평단의 호평 속에 이듬해 아카데미상 애니메이션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디즈니 부활의 신호탄을 쐈다.
창의 경영을 보여주는 책 속의 많은 사례들은 결국 경영자의 겸손으로 연결된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는 문화는 결국 리더의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인정에서 출발한다. 경영자로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모든 의견에 열린 자세로 임하는 것이 창의 경영, 창조적 리더십의 출발인 셈이다. 책의 마지막에 저자가 정리한 '창의적 조직문화를 관리하는 법'에서도 겸손한 캣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만큼 확실하게 경영자의 시야를 좁히는 실수는 없다.'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난 뒤 1986년 루카스 필름의 그래픽스 그룹을 인수해 픽사를 설립하기까지의 과정, 저자가 26년 가까이 겪은 고인과의 추억도 흥미롭다. 1만 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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