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300억원대의 의류 수출업체인 K사는 지난해 '키코(Kiko)' 사태로 적잖은 손실을 입은데다 은행 대출 등 부채만 180억원에 달한다는 이유로 지난 5월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했다. 채권단은 법원에서 K사의 회생절차 개시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곧바로 채권회수에 나섰지만 이미 회수 가능한 자산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 회사 사장은 K사가 부도처리된 후 임직원들을 불러모아 다른 곳에 유사상호로 법인까지 새로 설립해 버젓이 공장을 가동하고 있지만 법인의 채무의무는 해당 법인에만 책임을 지울 수 있다는 '법인격 부인' 조항 때문에 채권자들은 신생 법인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최근 시중 은행권의 기업대출 담당자들 사이에는 회생절차 신청기업이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경기침체 여파로 경영난을 겪는 업체들이 채무변제를 회피하기 위해 회생절차 신청을 악용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지만 뚜렷한 묘안을 찾지 못한 채 은행권의 부실만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의로 회생절차를 신청하는 업체의 경우 협력업체들의 연쇄도산을 초래할 수밖에 없어 은행권이 갖는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경기가 어렵다 보니 몇 천만원짜리 어음을 회수하지 못해도 협력업체들은 줄줄이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라면서 "멀쩡한 협력업체들이 하루아침에 부도를 내 본부 연체관리반으로 넘어가는 상황을 빗대어 '시체 치운다'는 유행어가 나돌고 있을 정도"라며 씁쓸해 했다. 현행 통합도산법에서는 기업이 회생절차에 들어가도 대주주의 경영권 유지가 가능한 '기존 관리인 유지제도(DIP)'가 적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주식회사라도 실질적으로 대표 1인이 대주주이거나 가족이 경영하는 사례가 많아 경영권 방어가 가능하다는 허점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통상 2~3개월이 소요되는 법원의 회생절차 개시 심사기간에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강제(임의) 경매 및 공매가 모두 중지되며 ▦보전처분 및 포괄적 금지명령으로 채무자의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금지하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악용될 만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전자부품 업체인 C사도 경영난에 시달리다 지난달 은행권 등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해버렸다. 다급해진 주거래은행의 여신담당자들은 사장을 만나려고 수차례 회사를 찾아갔지만 번번이 허탕을 치고 말았다. 어음이 동결되는 바람에 40여곳의 협력업체 가운데 한달 새 부도를 낸 곳도 10여곳에 이른다. 반면 C사 대표는 값비싼 외제승용차까지 구입해 타고 다닐 정도로 한껏 여유를 부리는 등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은행의 한 관계자는 "C사 대표가 지난 7월께 추가 대출 가능 여부를 단 한차례 전화로 물어왔을 뿐 은행에도 알리지 않고 회생절차를 신청했다"며 "채권ㆍ채무관계 정리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 없이 바로 회생절차를 신청한 것은 문제가 많다"고 강조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근에는 법적인 맹점을 파고든 조직적인 브로커들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 중소업체 대표는 "최근 회사사정이 나빠지자 업계 사정에 빠른 3~4명의 브로커가 접근해 회생절차를 신청하면 회사 자산을 빼돌리고 새로 창업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겠다고 제안해왔다"며 "업계에서는 이 같은 브로커들의 존재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전했다. 이처럼 기업회생 절차가 곳곳에서 후유증을 낳으면서 은행권 등에서는 거래기업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대출심사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의도적으로 모럴해저드에 빠져드는 기업을 방지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비상장 중소기업의 경우 기업 경영내용이나 자산 변동상황이 불투명한 경우가 많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일일이 점검하고 관리할 만한 시스템을 갖추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법무부는 특별한 신청이 없더라도 도산절차를 신청하는 즉시 채무자 재산에 대한 권리행사가 정지되는 '자동중지제도'를 도입하고 재산을 숨긴 뒤 도산절차를 밟으려는 기업 등을 조사하는 감독기관 설립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법무부 개정안에는 경기침체의 영향을 반영하듯 채무자의 경제적 회생을 도모하기 위한 '채무자 친화적인 제도'가 다수 담겨 있다"며 "기업들의 모럴해저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해관계자를 폭넓게 참여시키는 사전조정제를 보완하는 등 규제와 감독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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