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책당국은 시중은행에 "단기 외화차입을 줄이고 추가적인 신용공여한도(credit lineㆍ대출한도액을 미리 확보하는 것)를 늘리라"고 당부했다. 올해 유럽의 재정위기, 미국의 더블딥 가능성, 중국의 긴축 등 불확실한 대외 경제상황이 자칫하면 글로벌 신용경색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달 들어 주가가 폭락한 것도 이런 우려가 반영됐다. 현재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 규모나 외채 만기구조만 보면 외환위기를 크게 걱정할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화유동성 위기를 1997년, 2003년, 2008년 등 5~6년마다 주기적으로 겪었다. 더 이상의 위기 재발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외환위기 재발 방지는 물론 인플레이션도 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7월 말 현재 외환보유액은 3,110억달러로 외환유동성은 비교적 안정적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외환보유액이나 단기외채 규모가 적정 수준인지 판단하긴 어렵다. 외환보유액이 너무 많으면 인플레이션과 자산 버블 위험이 있다. 반면 부족하면 외화자금 경색 및 디폴트가 우려된다. 외환보유액의 적정 규모는 외국 자금이 얼마나 많이 국내로 들어오고 위기 때 얼마나 많은 자금이 갑자기 빠져나가느냐에 달렸다. 자본통제 아래에선 외환보유액이 비교적 적더라도 어느 정도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다. 금융규제ㆍ감독 등 자본이동을 억제하는 조치들은 많다. 정부는 지난번 금융위기 때 수백 개의 기업이 키코(KIKOㆍKnock In Knock Out) 등 복잡한 파생상품 거래로 막대한 손해를 겪은 후 불투명한 장외파생상품(OTC) 시장을 단속하고 있다. 이달부터 은행의 비예금성 외화부채에 은행세(외환건전성부담금)가 부과된다. 과도한 단기자본 유입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올해의 경우 은행에 부과되는 금액은 연간 2억1,000만달러로 추정된다. 그만큼 은행의 수익은 줄고 단기자본 유입도 감소할 것이다. 금융기관들은 자본ㆍ파생상품 규제 등이 금융혁신을 저해하고 글로벌 금융 중심지로서 한국의 명성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반대한다. 금융계 일각에선 "문제가 없는데 정책당국이 공연히 불안감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6월 말 현재 단기 외화자산을 단기 외화부채로 나눈 '외화유동성 비율'은 100.3%였다. 유사시 단기 외채를 상환하라는 요구가 쇄도해도 단기 외화자산으로 어렵지 않게 갚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은행들은 과거에도 외화유동성에 문제가 없다면서 단기 외채를 들여와 돈장사를 하다 위기가 닥치면 정부에 손을 벌리는 행태를 되풀이했다. 그렇더라도 쓰러지도록 내버려두기에는 너무 큰(too big to fail) 은행들을 어쩌겠는가. 이 같은 도덕적 해이는 엄격히 제재해야 한다. 투기자본 통제와 관련해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외환보유액이 이미 적정 수준을 넘어선 이상 자본의 급격한 유출에 대비하는 통제수단을 새로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브라질이 자국 증권에 투자하는 외국인에게 2%의 거래세를 매기기로 한 것을 계기로 자본통제 방안이 인도네시아ㆍ러시아 등지로 확산되는 분위기지만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이 독자적으로 자본의 이동을 막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 이동을 막기 어렵다면 과도한 외환보유액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외환보유액을 늘리면 통화량이 증가해 물가를 올린다. 국내 인플레이션이 이미 심각한 국면으로 전개되는데 외환보유액을 늘리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우리 마음대로 외환보유액을 늘리는 것이 쉬운가. 한국이 환율조작국이라는 비난은 접어두더라도 이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외환보유액은 오히려 줄여야 할 판이다. 외화유동성 위기 재연을 막기 위해 자본통제나 은행세 및 각종 금융규제ㆍ감독을 줄이고 외환보유액을 늘리는 것과 외환보유액을 줄이고 각종 규제 등으로 대체하는 것을 비용효율 면에서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통화관리가 중요한 만큼 외화유동성의 변동성은 자본규제로 막아야 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