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라는 것이 방금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도깨비방망이인가. 전혀 새로울 게 없는데 요란을 떨고 있다. 법리전문가도 아닌 정치권 사람들이 헌법을 이리저리 제 마음대로 해석하려 하니 더 가관이다.
경제민주화는 지난 1987년부터 우리 헌법119조2항에 실존해왔다.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거슬러가면 5공헌법, 3공헌법도 경제민주화 구현도구를 다 가지고 있었다. 더 멀리는 1948년 제헌헌법이다. 그 모델이 된 독일 바이마르 헌법은 이미 100년 전 자유시장에 대한 국가개입 근거를 명시하고 있었다.
정부의 시장규제 정책도 광복 이후 지난 60여년간 이 바탕 위에서 큰 탈없이 작동돼왔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헌법조항이 강화 또는 완화됨에 따라 규제가 풀리거나 조여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제상황을 비롯한 총체적 시의에 따라 규제의 수위조절이 이뤄졌던 것이다. 헌법의 문맥을 따지지 않고서도 역대 정부는 할 규제는 다 했다. 최초의 진보정권인 노무현 정부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오히려 완화했다.
최근 신문에 인용된 두 전문가의 견해를 보자. 두 사람 다 김종인 씨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독일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자유방임과 사회적 시장경제, 국가주도의 통제경제라는 3가지 경제모델 중 헌법 119조는 사회적 시장경제에 가깝다.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을 양극단으로 해석하면 무리가 따른다. 그런 특성을 무시하고 진행되는 경제민주화 논쟁은 이해집단의 갈등만 부추긴다"(장영수) "헌법 경제조항은 자유와 통제의 양 극점 사이에서 인정되는 국가 간섭의 폭을 매우 넓게 설정했다. 이것이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는 강온의 수단을 폭넓게 동원해 단기간에 고속성장을 할 수 있게 한 법적 배경이었다."(김형성)
바로 이거다. 우리나라는 자유방임체제도 아니고 계획통제체제도 아니다. 법 제정자들이 시장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119조1항에 규제를 언급한 2항을 추가했을 때는 1항과 잘 지내라고 한 것이지 싸움질하라고 집어넣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길은 빤하다. 국가가 시장자유를 존중하면서 절도 있게 개입하면 된다. 지금껏 그렇게 해온 덕에 경제기적을 이루고 세계 7번째의 20-50 국가가 됐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갑자기 난리법석이다. 대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전략전술의 타깃은 정해져 있다. 재벌이다. 방법과 수단도 찾아놓았다. 문제는 공격의 명분과 강도이다. 민주화라는 구호가 이럴 때 안성맞춤이다. 대중을 상대로 할 때 민주화라는 깃발을 달면 무엇이든 번쩍번쩍 빛이 난다.
이게 작금의 경제민주화 소란의 실체다. 지난 수십년간 선거 때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했던 그 놈의 '재벌 타령'이다. 거기다가 이번에 뭐 대단한 철학적 깊이가 있는 것처럼 포장을 했지만 경제민주화의 개념과 도구들은 새로울 게 없다. 1930년대 대공황과 수정자본주의,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계속 존재해왔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지금 글로벌 경제의 문제아가 된 유럽 사회민주주의다. 21세기 우리나라의 집권당은 이렇게 진부한 것을 새삼스레 끄집어내 고답적인 논쟁을 벌인다.
구닥다리 타령은 집어치울 때도 됐다. 재벌이 커져도 정치가 깨끗하면 큰 문제 없다. 재벌규제 따위는 테크노크라트에게 맡기고 위정자들은 큰 그림을 그려야 국민이 행복해진다. 정보통신기술이 세상을 확확 바꾸고 있다. 세계는 자본주의의 대안체제를 찾고 있다. 이런 지형에서는 케케묵은 프레임의 원론적 논쟁에서 맴돌 이유도 시간도 없다. 대선레이스는 미래지향적 국가 패러다임의 경연장이 돼야 한다. 흘러간 노래를 편곡하지 말고 신곡을 국민에게 들려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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