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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ㆍ달러 환율도 중요하지만 원화와의 관계에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15일 열린 일본 중앙은행의 지점장회의에 참석했던 마에다 준이치(前田純一) 일본은행 나고야 지점장은 회의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강조하며 "엔고(円高) 때문에 지역 내 자동차 업체가 사업계획을 하향 조정할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나고야는 일본 대표 자동차 업체인 도요타가 기반을 둔 지역이다. 마에다 지점장은 이어 엔고와 한국 원화의 관계를 의식하는 기업들이 점차 늘어나는 산업계 분위기를 전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날 보도했다. 약달러발(發) 엔고 타격에 시달리는 일본에서 한국 견제 및 위협론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다. 달러화뿐 아니라 원화에 대해서도 가파른 엔고 추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내외 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잃은 일본 기업들에 한국 경쟁업체들이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엔고 압박을 견디다 못한 대기업들의 생산기지 해외 이전과 일부 기업들의 파산 사태 등 극심한 엔고로 산업계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자 일각에서는 외환당국이 달러화뿐 아니라 원화를 매입해서라도 원화 약세를 저지해야 한다는 '강경론'마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요미우리신문은 16일 "일본 기업들이 엔고로 어려움에 처한 반면 한국의 자동차 및 전자업체들은 세계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며 "일본 기업의 경쟁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정부와 일본은행이 원화를 매입하는 시장 개입에 나서야 한다는 강경론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엔화와) 아시아 통화의 관계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일본 재계단체 간부의 말을 인용하며 "엔화가 사상 최고치로 향하고 있는데도 한국과 중국은 자국 통화가치 상승을 억제하고 있어 정부와 재계에서 이들 국가의 환율정책에 대한 비판이 부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상 최고(달러당 79.75엔) 수준에 육박하는 엔고의 파괴력은 일본 산업계 곳곳에서 가시화되고 있다. 15일 미쓰비시자동차는 오는 2012년부터 생산할 신형 소형차의 생산기지로 태국을 낙점했다. 당초 예상을 크게 웃도는 엔고 현상 때문에 수익성이 낮은 소형차를 국내에서 생산해서는 이익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도요타도 다카오카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주력 소형차인 수출용 '코롤라'의 국내 생산을 전면 중단하고 생산공장을 해외로 옮길 계획인 것으로 밝혀졌다. 스즈키 역시 해외에 소형차 생산공장을 건설 중이고 지난해까지 일본 국내에서 생산되던 닛산의 대표 소형차종 '마치'역시 올해부터 태국에서 생산되고 있다. 이밖에 파나소닉과 샤프 등도 엔고로 까먹는 이익을 만회하기 위해 해외생산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이 상대적으로 낮은 통화가치를 무기로 세계시장에서 맹공을 펼치는 상황에서 엔고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국내 생산을 고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본의 경제주간지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엔화가치가 1달러당 1엔 상승할 때마다 사라지는 도요타자동차의 영업이익은 300억엔. 1엔의 엔고는 닛산자동차ㆍ혼다ㆍ캐논ㆍ샤프 등 주요 자동차, 전자업체의 이익도 각각 120억엔ㆍ110억엔ㆍ42억엔ㆍ10억엔씩 갉아먹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리고 사라지는 이들 업체의 이익 가운데 상당액은 제품력에서 뒤지지 않으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한국 기업들의 몫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는 인식이 형성되고 있다. 엔고 여파로 이미 파산으로 내몰린 기업들도 여럿이다. 대형 자동차 및 전자업체들의 해외 러시로 관련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들이 문을 닫는 것은 물론 일본항공(JAL) 파산과 긴자 세이부백화점 폐점 등 일본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준 사례도 속출했다. 당시 JAL은 상대적으로 이용가격이 저렴한 대한항공과의 경쟁에서 밀렸다는 점이, 세이부백화점은 원화 약세에 따른 일본 소비자들의 한국 원정쇼핑이 각각 몰락의 원인이 됐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중소기업계에서도 한국에 대한 경계심이 고조되고 있다. 주요 거래처인 대기업들은 속속 해외로 이전해가는 한편 주요 가전 및 자동차 업체들이 부품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한국산으로 갈아탈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지난달 열린 '한일 부품소재조달전시회'에 처음으로 일본 자동차 업계가 참가했다며 "한국산 부품 이용이 늘어난다면 중소 부품 메이커에 영향을 미쳐 고용기회가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달 산업계의 요구에 따라 일본 경제산업성이 재무성 측에 엔화를 팔아 원화를 직접 매입하는 시장개입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나라의 자본거래 규제 등을 감안하지 않은 이 같은 요청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원화 약세를 유지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고 있다는 일본 측의 비난과 대한 견제론은 높아지는 엔화 가치와 함께 점차 고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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