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안 의사 의거 100주년, 순국 99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안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는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 규모를 더욱 크게 늘려 다시 짓기로 했다고 한다. 홍범도ㆍ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가 항일독립전쟁 최대의 승첩이라면 안 의사의 하얼빈의거는 독립운동 사상 최대의 쾌거였다.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은 안 의사가 일제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곳이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하얼빈역 플랫폼에 울려 퍼진 총성 네 발은 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에 '대한국인'의 용장한 기개를 한껏 떨친 장쾌한 의거였다. 안 의사는 1909년 이전부터 수백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경과 싸우다가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민족의 원수, 동양평화의 적 이토를 몸소 처단하고자 결심했다. 안 의사는 그해 10월21일 동지 우덕순ㆍ유동하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하얼빈에 도착해 그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10월26일 오전9시30분께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와 멎고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 마중 나온 러시아 대신 고고프체프와 의장대를 사열한 뒤 각국 영사들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권총을 뽑아 들고 뛰쳐나간 안 의사는 이토에게 총탄 네 발을 연발했다. 첫 발은 이토의 앞가슴에, 제2탄은 옆가슴에, 제3탄은 배를 관통했다. 의거가 성공하자 안중근 의사는 "대한독립 만세"를 세 번 외치고 태연하게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하얼빈역에서 300m쯤 떨어진 만주 둥칭(東淸)철도국 사무실로 끌려간 안 의사는 "나는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적장을 총살, 응징했다"고 당당히 진술했다. 러시아군에서 일본영사관으로 넘겨진 안 의사는 그 뒤 200여일 동안 뤼순감옥에서 고초를 당하다가 이듬해 3월26일 조국을 위해 귀중한 목숨을 바쳤으니 그해에 꽃다운 나이 31세였다. 통탄할 사실은 안 의사가 순국한 지 올해로 99주년, 내년이면 100주년이나 되건만 아직까지 무덤과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못난 후손들은 참으로 안 의사를 비롯한 선열들께 면목이 없다. 희생정신, 국난극복귀 감삼아야
순국 99년, 의거 100년이 되도록 안 의사의 무덤도, 유해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한 일본이 매장지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으며 관련자료도 모두 소각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하얼빈 영사가 '안중근의 유해를 절대로 가족에게 인도하지 말라'고 관둥도독부에 보낸 전문이 최근 발굴되기도 했다. 안 의사의 손자 안응호씨와 증손자 토니 안씨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 살고 있다고 한다. 후손들이 조국을 떠나 사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입장이 아니지만 해마다 안 의사의 의거일과 순국일만 되면 기념관을 새로 짓느니 세미나를 여느니 하는 것보다 안 의사의 거룩한 순국정신을 제대로 되새겨보는 것이 좋겠다. 지금 우리는 또다시 정치ㆍ경제ㆍ외교ㆍ군사적으로 난국을 맞았다. 국난극복의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안 의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귀감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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