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불법취득재산 은닉, 이재현 CJ 회장의 비자금 조성 등 굵직한 경제 비리가 부각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게 차명계좌다. 차명거래가 주가조작ㆍ횡령ㆍ불법대출 등 거의 모든 경제범죄 사건의 단골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차명거래를 금지함으로써 이들 불법행위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미 국회에서는 차명거래를 금지하는 금융실명제 보완법들이 발의돼 9월 정기국회에서 본격 논의될 예정이다. 하지만 동창회 등 선의의 차명계좌도 많은데다 본질적으로 불법행위를 위한 차명인지, 선의의 차명인지 구분 자체가 어려워 차명금지를 할 경우 사회적 혼란과 비용이 만만찮을 것이라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양측 견해를 싣는다.
▲ 찬성 김재진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지하경제 양성화 위해 차단 필수
선의의 계좌는 신탁제로 보완 가능
역사의 발전은 시대적 상황의 산물이다. 때로는 급류처럼 휘몰아치면서 단숨에 큰 진전을 이루기도 하지만 때로는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변화하기도 한다. 전직 대통령이 전재산이 29만원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1,673억원의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고 호화생활을 하는 게 차명거래를 통해 재산을 빼돌렸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금융실명법을 보완해 차명거래를 금지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20년 만에 형성되고 있다. 문제의 근원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1년 제정된 '예금ㆍ적금 등의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필요한 자금의 원활한 조달을 위한 가명 또는 무기명에 의한 금융거래의 허용으로 단기적으로는 재원조달에는 기여했지만 장차 탈세, 불법자금 세탁, 비자금 조성, 정경유착 등 부정부패가 확산되는 여지를 법적으로 허용한 것이 됐으며 그 부작용은 1982년 이철희ㆍ장영자 부부의 대규모 어음사기사건으로 폭발했다. 이 사건으로 정권의 부도덕성이 부각되자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982년 9월 '금융실명제에 관한 법률'을 입법화했지만 시행 시기를 유보했고 노태우 전 대통령도 1989년 4월 금융실명제 실시단을 구성했지만 기득권층의 반발로 좌절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13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발동해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했으며 1997년 대통령 긴급명령 형식의 금융실명제를 보완하기 위해 오늘날의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하지만 금융실명법에는 차명거래에 대한 아무런 규제조항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불법금융거래의 가능성이 상존해 금융실명제의 결정적인 문제점으로 남아 있으며 '금융차명법'이라는 오명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금융실명법은 여전히 미완성 상태이며 최소한 그 허점을 이용해 탈세를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유명무실(有名無實)한 법이다. 차제에 차명거래를 차단하기 위해 금융실명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존의 유명무실한 금융실명법을 명실상부한 금융실명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다분히 상식적인 목소리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외 없이 차명거래를 차단하면 선의의 다수 국민이 피해를 입게 되는 등 부작용이 심각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즉 이번에 금융실명법 개정에 반대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논리는 차명거래를 불법화하면 동창회ㆍ친목회 등 '선의의 차명거래'를 이용하는 다수 국민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동창회ㆍ친목회 등 소위 선의의 차명거래라는 것은 외국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에서는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 한다. 뉴질랜드의 경우 금융실명제를 준수하면서 가족ㆍ동호회ㆍ종교단체 등 소위 선의의 차명거래는 신탁(Trust)제도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차명거래를 통해 불법 상속, 탈세, 비자금 조성을 일삼아왔던 무리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를 막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명분이 없기 때문에 선량한 국민의 감정에 호소해 막아보려는 의도는 아닌지 저의가 의심스럽다. 마치 20년 전 금융실명제 도입 당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게 되면 저축액의 감소, 주식가격 폭락, 부동산가격 급등, 자금의 해외유출, 중소기업의 부도 급증 등으로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차명거래를 차단해야만 금융실명법은 태동 20년 만에 비로소 완성되고 지하경제도 양성화할 수 있다.
▲반대 최규연 저축은행중앙회 회장
실명제 고쳐도 불법 적발 어려워
기존 처벌규정 강화가 더 효과적
금융실명제는 1982년 소위 장영자ㆍ이철희 어음사기 사건을 계기로 논의가 시작돼 전국민의 관심 속에 그 시행 여부를 놓고 10여년간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1993년 8월12일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후에는 차명거래 금지 여부를 놓고 20여년 간 간헐적으로 논의되다가 최근에는 사회의 핵심쟁점으로 부상했다. 하나의 제도도입을 놓고 30여년 간 국민적 관심과 논의가 지속된 사례는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20년 전 금융실명제를 실시할 때 실무 작업을 했던 사람으로서 최근 차명거래 금지에 관한 논의를 보면서 당초 금융실명거래 관련 법령에서 차명거래를 금지하지 않은 이유들을 정리해보았다.
불법행위에 이용되는 차명거래를 억제해야 한다는 데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떻게 방지할 것이냐는 방법론이다. 첫째 방안은 실명거래법을 개정해 차명거래를 금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명거래법이 금융회사 직원에게 실명확인 의무를 부과하는 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현실성이 전혀 없는 방안이다. 그 이유는 실제 소유 여부의 확인이 필요한 차명거래 금지의무를 금융회사 직원에게 부과하는 것은 금융회사 직원은 자금의 실제소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권능이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행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금융거래만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방안은 실명거래법에 금융 거래자에게 차명거래 금지 의무를 직접 부과하고 위반자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명거래법이 금융기관 직원에게 실명의무를 부과하는 법이기 때문에 법의 성격과 체계에 맞지 않는다.
셋째 방안은 법체계를 무시하고 실명거래법에 차명거래의 명의인이나 이용자를 처벌하는 것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차명거래는 금융기관과는 무관하게 명의인과 이용자 간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고 차명거래 여부와 그것이 불법행위에 이용되었는지 여부를 적발하고 확인하는 것은 세무당국이나 수사당국의 자금추적 조사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사항을 금융당국의 소관법령에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설사 규정을 하더라도 효과적인 시행을 기대할 수 없다.
위에 열거한 이유들 때문에 선진 각국에서도 금융회사 직원이 금융거래가 범죄에 이용되고 있는 혐의를 포착하면 그 사실을 조사할 권한이 있는 정부 당국에 신고하는 의무만을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도 같은 취지의 규정을 두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실명거래법에 차명거래 금지를 규정하는 것은 불법행위에 이용되는 차명거래를 억제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명거래를 이용한 불법행위를 막는 최선의 방법은 우선 탈세ㆍ부정ㆍ비리 등의 불법행위를 철저히 적발해 차명거래를 이용한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 명의인과 이용자를 위법성 여부와 정도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다. 둘째는 탈세ㆍ부정ㆍ비리 등의 불법행위를 규정한 법령에 차명거래의 명의자와 이용자에 대한 처벌규정이 미흡한 경우에는 이를 보완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는 것이다.
이상의 이유 때문에 1993년 시행된 금융실명거래 관련 법령에서는 차명거래에 대한 금지 규정을 두지 않은 것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