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2월28일 새벽1시5분,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 10일째 농성 중인 신민당 의원들이 포진한 본회의장에 공화당 의원들이 들어왔다. 의장석 주변을 점거한 야당이 놀라는 순간 출입구에서 여당이 본회의 개회와 예산안 상정을 선언했다. 거친 몸싸움과 의원 명패가 날아가는 난투극 속에 2,214억8,200만원의 1968년도 예산안이 통과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분. 의안설명과 심사보고ㆍ토론도 없었다. 새벽에 벌어진 날치기 예산안 통과는 아침 전 신문의 호외를 타고 시내 바닥에 퍼졌다. 날치기는 자유당 시절부터 있었지만 예산안이 본회의에서 날치기로 처리된 것은 사상 초유. 의장석을 옮긴 경우도 처음이었다. 정국은 바로 얼어붙었다. 공화당에 개헌이 가능한 의석을 안겨준 1967년 6월의 7대 총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졌다며 5개월간 등원을 거부하다 부정선거 조사를 위한 특별법 마련을 조건으로 국회에 들어왔던 신민당은 전면 투쟁을 선포했다. 부정선거 시비와 날치기 파동의 후유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대신 자리잡은 게 ‘안보’. 북한의 도발 때문이다. 1968년 김신조 등 124군부대 특공대의 청와대 기습과 북한의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으로 정치의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참았던 봇물이 터지듯 한번 시작된 새벽의 날치기는 1969년 9월의 대통령 3선 개헌안과 국가보위법(1971년) 파동을 거쳐 유신헌법 마련으로 이어졌다. 유신체제 붕괴의 원인인 부마항쟁도 1979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의원 제명결의안의 날치기 통과가 민심을 자극한 결과다. 의정사를 얼룩지게 한 날치기는 5ㆍ6공은 물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도 반복됐다. 정도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실용정부에서는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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