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한 외국계 회사는 인사부를 총괄할 부장급 직원을 모집했다. 외국계 회사여서 연봉이 많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는지 지원자가 많았고 학력도 훌륭했다. 그중 회사의 눈길을 끈 지원자는 A씨. 미모가 출중한데다 학력기재란에 적힌 미국 하버드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석사학위라는 학력도 마음에 들었다. 이후 A씨는 단계별 면접을 잇따라 통과했다.
면접 때 구사한 유창한 영어 실력은 그를 더 돋보이게 해 회사 간부들은 A씨를 인사부를 책임질 적임자로 판단했다. A씨가 최종 선택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했다.
하지만 A씨가 최종 합격된 뒤 보인 행동거지와 화려한 학력 등을 수상히 여긴 한 직원이 회사 임원들을 설득해 평판조회 업체에 조사를 의뢰했다. 평판조회 업체는 구직자의 이력, 신용 여부, 전 직장에서의 평판 등을 조사해주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곳. 이후 조사 결과에 회사 임직원들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A씨의 이력서는 가짜였고 외국 카지노 딜러로 일한 것이 유일한 경력이었다.
기업마다 우수인력 유치 차원에서 경력사원 채용을 늘리면서 '스펙 사기'가 활개를 치고 있다. 과거 경력을 쉽게 입증하기 어렵다는 것을 활용한 수법이다. 학력 등을 위조해 광주비엔날레 공동예술감독까지 오른 '신정아 사건'과 비슷한 유형이다. 평판조회 업체에 의뢰가 들어온 5건 중 1건 정도는 경력을 위조한 사례라는 게 관련 업체들의 설명이다. 이로 인해 평판조회 업체에 이력 조사를 의뢰하는 기업이 외국계는 물론 국내 대기업까지 확산되면서 관련 업체들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한 평판조회 회사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의 팀장급 이상 경력채용 때는 '뒷조사'가 필수 코스가 되고 있고 신입사원을 모집할 때도 과거를 조회해달라고 의뢰하는 것이 요즘 추세"라고 전했다. 그는 특히 "조사하다 보면 허위기재가 갈수록 늘고 있고 방법도 교묘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글로벌 평판조회 전문기업인 '퍼스트어드밴티지'의 정혜련 한국지사장은 "연평균 3,500건 정도 의뢰가 들어오는데 지난해에는 5,000건 넘게 의뢰를 받았다"고 말했다.
경력직의 '스펙 사기'는 기업들이 학력 등 스펙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이라고 관계자들은 분석한다. 또 최근 채용시장이 위축되면서 구직자들이 거짓으로 자신의 과거를 꾸며 돋보이게 하려는 것도 스펙 사기 증가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2012년 취업포털 사람인의 조사 결과 10명 중 4명이 이력 허위기재 등 거짓말을 해서라도 취업하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최근 대기업 구조조정에서 밀려난 조모(43)씨는 "재취업을 하기 위해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있는데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면접 때마다 학교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며 "학력을 거짓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직을 위해 경력을 허위로 기재했다가 사법당국의 처벌 등 큰 봉변을 겪을 수도 있다.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사안마다 다를 수 있지만 형법상 사문서 위조, 업무방해죄 등으로 처벌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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