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충돌, 즉 정신문화와 물질문명 대립의 오늘날을 '빛을 잃어버린 시대'로 본다면 '순수한 빛의 출현'은 시대적 요구일 것입니다. 빛을 이용하는 미디어아트가 인간의 영혼을 채우는 '새로운 빛'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텔레비전 모니터라는 친숙한 매체에 디지털 애니메이션 기술을 접목해 동서양의 명화를 움직이는 영상으로 선보여온 작가 이이남(45·사진)은 이 시대 미디어아트(기계·기술을 접목한 예술)의 소명을 이같이 말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16일 개막하는 개인전 '다시 태어나는 빛'에 앞서 기자와 만난 작가는 "디지털 기술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확장'의 긍정적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며 "아날로그를 배척한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와 어우러지는 디지털이라는 점을 눈여겨봐달라"고 당부했다.
전시장에는 캔버스 대신 모니터가 걸렸다. 화면은 17세기 스페인의 대표작가 디에고 벨라스케스 등 고전 명화에서 차용한 빛과 촛불이 있는 그림들이 채우고 있다. 원작과 달리 때때로 촛불이 흔들리고 사람들도 움직이는 등 '새로운 생명력'을 가진 게 이이남 작품의 특징이다. 18세기 조선의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의 산수화 7폭에서는 배가 움직이고 인물들이 오간다. 등장인물 중에는 백남준도 있고 십자가 대신 텔레비전을 지고 가는 예수도 보인다. 작가는 "동양화 속에 서양의 역사를 넣었다"며 "TV를 지고 가는 예수는 디지털의 죽음과 재탄생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대표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차용한 작품은 그림 속 여성이 따르는 우유가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처럼 아래로 길게 떨어지는 식으로 동서양이 만났다. 다양한 설치작품이 선보인 이번 전시는 작가가 화풍의 변신을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지만 판단은 관람객의 몫이다.
작가는 지난 2006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김홍도의 '묵죽도'와 모네의 '해돋이'를 결합한 작품을 선보이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잘 알려진 명화를 이용하기 때문에 대중 호응도가 높고 해외 아트페어 등지에서 인기가 높다. 그러나 작품제작에 대한 '아이디어'는 저작권 보호를 받지 못해 중국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모방작이 나도는 실정이다. 작가는 "나 또한 명작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고 현대미술에는 이런 차용에 대한 관용의 풍토가 있다"면서도 "하지만 이미지를 빌려 쓰는 것과 기술적 오리지낼리티(원본성)를 도용하는 것은 분명 다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작가는 내년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본전시, 국가관 전시와 별개로 마련된 특별전에도 초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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