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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3월9일] 햄튼로드 함포전


1862년 3월9일, 미국 버지니아주 동남부 햄튼로드항. 북군의 모니터호와 남군의 버지니아호가 맞붙었다. 사상 처음으로 철갑선끼리 포화를 주고 받은 순간이다. 북부의 남부에 대한 경제봉쇄가 통한 것도 이때부터다. 당초 양측의 예상은 남부의 우세. 버지니아호 때문이다. 버지니아는 남북전쟁 이전까지 연방해군에서 가장 강력했다는 메리맥호의 철갑 개량형. 배수량 3,500톤에 함포 12문을 보유한 버지니아는 987톤, 함포 2문에 불과한 모니터를 외형상 압도했다. 더욱이 모니터는 배의 높이가 낮아 북군조차 ‘뗏목’이라 부르며 성능을 반신반의했던 반면 버지니아호는 하루 전 북군의 목조 함정 두 척을 격침시켜 사기도 높았다. 결과는 무승부. 오히려 모니터가 우세했다. 측면의 함포를 쏘기 위해 배를 수시로 돌려야 했던 버지니아와 달리 회전포탑을 장착한 모니터는 어느 위치에서나 함포를 쏴댔다. 모니터의 탄약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북군의 승리가 됐을 법한 전투 결과는 각국에 전해져 증기엔진, 스크루 추진체, 회전포탑을 갖춘 전함건조 경쟁을 낳았다. 전투는 전쟁의 흐름도 갈랐다. 햄튼로드해전 이후 남부는 바다에 나오지 못했다. 남부가 초반의 승세를 굳히지 못한 것도 면화 수출과 군장비와 탄약ㆍ피복ㆍ의약품 수입 통로인 항구를 봉쇄 당했기 때문이다. 북부의 해상봉쇄가 성공하자 면화를 공급받기 위해 남부를 지지했던 영국과 프랑스도 중립으로 돌아섰다. 소형 선박을 이용해 봉쇄선을 뚫으려던 남부의 시도 역시 북부가 양산한 모니터급 함정 64척에 막혔다. 결국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린 남부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북부의 승리 뒤에는 두 가지 ‘절대반지’가 있었다. 스웨덴 출신 기술자 존 에릭슨의 혁신적 설계인 모니터호와 제조업 경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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