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의 눈을 통해 재판을 한다'는 취지로 지난 2008년 2월 시작된 국민참여재판이 제도 도입 4년째에 접어들면서 외견상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소말리아 해적 사건 등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 대해 판결의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고 사법부의 신뢰도 또한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한 편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국민참여재판이 아직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며 불안한 시선을 감추지 않고 있다. 특히 시간적 제약으로 배심원의 정확한 판단이 이뤄질 수 있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실제로 지난달 말 기자가 '그림자 배심원' 자격으로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해 보니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올해 초, 서울의 한 경찰서에 실핏줄이 다 터져 빨갛게 된 눈을 한 여자가 찾아 왔다. 그녀의 목은 손으로 눌린 자국이 선명했다. A(21ㆍ여)씨는 사귀던 남자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경찰에 털어놨다. 신고 며칠 전 A씨와 남자친구 B(32ㆍ구속기소)씨는 데이트를 위해 전남 영광시에 내려갔다. 남자친구의 고향인 영광에서 그들은 술을 마셨다. 얼큰하게 취한 둘은 모텔까지 차로 이동했지만, 그 앞에서 언쟁이 벌어졌다. A씨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고, 남자친구 B씨는 "음주운전을 하란 얘기냐, 쉬었다 가자"며 그녀의 요구를 묵살했다. 싸움이 격해지자 B씨는 화를 누르지 못하고 A씨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모텔에 올라가서도 B씨의 목 조르기는 이어졌다. 그 다음날 B씨는 하루 종일 A씨를 데리고 다녔고 또 한 차례 모텔로 향해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성관계를 맺었다. 경찰조사 결과를 넘겨 받은 검찰은 B씨를 살인미수와 강간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그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화를 참지 못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며 결혼상대로 생각하고 부모까지 만났던 여자를 죽일 이유가 없다며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지난달 26일 오전 9시. 서울중앙지법 형사대법정 417호에 출석한 60여명의 후보자 가운데 그의 유ㆍ무죄를 가르는 역할을 할 배심원을 고르는 절차가 시작됐다. 추첨과 질문이 수 차례 이어진 후 예비 배심원 1명을 포함한 8명이 배심원으로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검찰은 B씨의 살인미수 혐의가 유죄라고 주장하며 "목이 졸려 숨을 못 쉬게 된 피해자는 차 앞 유리창에 금이 갈 정도로 발버둥쳤다"고 증거를 댔다. 공판검사는 "두 사람이 사귀는 동안 B씨는 자신을 조직폭력배의 일원이라고 소개하는 등 예전부터 수 차례 폭행과 협박을 일삼았다"고 강조했다. B씨 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목이 졸렸던 A씨는 그 후 부축도 없이 자기 발로 걸어서 모텔에 함께 올라갔다. 그 다음날에도 반항이나 거절 없이 성관계를 수락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치열한 설전이 오가는 와중에 핵심적인 증언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배심원들의 눈빛이 빛났다. 그러나 재판이 길어질 수록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전 9시30분께 시작된 이날 국민참여재판은 12시간 가량이 지난 후 배심원들 사이의 논의인 평의가 시작됐다. 배심원 7명 전원이 만장일치로 살인미수 혐의는 무죄, 두 차례 저지른 강간은 유죄로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9부(배준현 부장판사)는 다음날 27일 0시께 B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기자가 '그림자 배심원'으로 직접 재판에 참여한 후 느낀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평균 열 시간을 훌쩍 넘기는 긴 재판과정 탓에 '국민의 지혜'를 구한다는 국민참여재판의 목적이 제대로 달성되기 힘들다는 점이 첫 손 가락에 꼽혔다. 실제로 7월 넷째 주에 열린 두 번의 국민참여재판은 각각 다음날 새벽 4시30분과 새벽 2시30분께 종료됐다. 국민참여재판은 배심원 등의 개인적인 사정 탓에 대체로 하루 만에 끝내야 한다. 당일 출석하기로 한 증인이 나오지 않을 경우 난감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점도 자주 거론되는 단점 중 하나다. 지난달 27일 방청한 재판에서도 A씨가 목이 졸린 다음날 B씨까지 포함해 셋이서 함께 술을 마셨다는 B씨의 지인이 출석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국민참여재판 신청 진행과정이 복잡하고 번거롭다는 이유에서 검찰 측이 사실상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이날 공판에서 피고인 B씨는 "국민참여재판 신청을 하자 조사가 다 끝난 시점인데도 검사가 두 차례나 더 불러 '신청을 철회하라'고 압박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검찰의 태도는 일반 재판에 비해 공판준비절차도 여러 번 밟아야 하는데다 전문 법관이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복잡한 형법의 원리, 유ㆍ무죄 판단을 구하는 것이 검찰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법관 재판보다 국민참여재판에서 무죄판결의 비율이 높다. 지난 2008년 1월부터 2009년 8월 31일까지 배심원이 참여한 재판 108건 가운데 무죄평결은 10건(9.25%), 무죄 판결은 7건(6.48%), 유ㆍ무죄가 섞인 평결은 24건(22.2%)이었다. 반면 법관재판(2008년 1심 기준)은 무죄판결률이 1.46%로 매우 낮았다. 이밖에 피해자의 신분이 일반 대중에게 쉽게 드러날 수 있다는 점도 취약한 부분으로 거론된다. 특히 이름과 나이, 거주지 등이 재판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노출되는 피해자의 신분이 성범죄 사건의 경우 피해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