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경제신문 취재진이 다시 찾은 안산에는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감지됐다. 오랫동안 조용했던 카페에는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고 단원고 앞 문구점과 음식점도 다시 문을 열었다. 희생자 부모 45명은 일터였던 시화·반월공단으로 돌아갔다. 내 아이 잃은 아픔 속에서 일상을 시작한 것은 저마다의 배려였다. 남아 있는 가족을 생각했고 서로가 팔고 팔아주는 생계 그물망으로 엮인 이웃을 생각해서라도 힘을 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고가 나던 날 생일을 맞아 주민등록증을 받을 수 있게 됐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수학여행을 떠났던 단원고 앞 현탁이네 세탁소도 다시 문을 열었다. 사고 당일 현탁이가 곧 돌아올 것으로 믿고 붙여놓은 '내일(17일)까지 쉽니다'라는 손메모도 떼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아픔을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니다.
조심스레 안부를 물었지만 아직 눈이 부어 있는 현탁이 엄마는 현탁이 이야기는 못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살아가야 할 사람이니까. 유명인도 아니고 잘난 엄마도 아니고 그냥 엄마니까…." 엄마는 더 말을 잊지 못하고 기자의 손을 꼭 잡았다. 며칠 전에야 겨우 밥을 뜨기 시작했다는 현탁이 엄마에게 취재 대신 따끈한 김밥 두 줄을 사서 건네고 되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가던 학교 앞 분식집에서는 이제 남은 가족들이 밥을 먹는다. 고 최혜정 선생님의 아버지는 병원에 갈 때마다 2㎞ 넘게 걸어와 이곳에서 라면을 먹는다. 딸의 추억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분식집 아주머니가 듣건 말건 딸 자랑을 한다. '지난해 자신이 다쳐 팔을 못 쓰게 됐을 때 머리를 감겨주던 딸이라고. 모두가 내 딸 같기만 해도 세상이 참 괜찮을 거라고. 짧은 생애 동안 너무 많은 사랑을 주고 갔다고….' 이틀 전에는 다른 희생자 가족이 밥을 먹으러 와 함께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아픔을 나누기도 했다.
아이들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70일간 등교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기말고사를 봤다. 22일 학교 수업을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은 시험지를 팔랑팔랑 나부끼며 뛰어가거나 장난을 치기도 했다.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시험과 방학이 세상에서 가장 괴롭고 기쁜 고2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한 주민은 열흘간 병실에서 함께 있던 아이들을 생각했다. 4월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안산 고대병원에서 생존학생과 방을 썼다. 병실에는 다섯 명의 생존학생이 있었다. 하루 종일 멍하니 있는 아이도 있었고 쉴 틈 없이 사고 이야기를 하던 아이도 있었다. 임씨는 아직도 말을 더듬던 아이가 눈에 밟힌다. 애들이 겉으로는 똑같아 보여도 어떻게 같을 수 있겠냐고 한다.
임시 분향소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희생자 가족 치유센터인 안산 온마음센터는 800명의 희생자 가족을 돌본다. 아직은 '치료' '정상'이라는 단어조차 쓸 수 없는 단계이지만 센터 선생님들은 긴 시간이 걸려도 상처를 아물게 하고 또 다른 상처를 내지 않는 것이 센터의 역할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희생자 가족들은 정치권에서 하는 일만 보면 다시 100일 전으로 되돌아가는 암울함을 느낀다. 한 희생자 가족은 이야기한다. "이 아픈 동네에서도 다들 겨우 힘을 내서 살아가고 있어요. 여기에도 시간은 가고 있는데 100일 동안 정부와 국회에서만 시간이 안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아픔을 견디는 희생자 가족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더 많은 특혜가 아니라 진실"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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