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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남부와 북부를 가르는 경계선이자 중원의 최심장부에 자리한 친링(秦嶺) 산맥. 그 앞에 펼쳐진 드넓은 관중평야에서는 지금 지난 1980년대 초 시작된 중국의 개혁ㆍ개방 역사상 최대 규모의 외자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바로 삼성이 중국 중서부의 산시성 시안(西安)에 투자하기로 한 7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공장건설 사업이 그것이다. 현장에는 땅 고르기 작업을 위해 흙더미를 실어 나르는 트럭 행렬이 줄을 잇고 수십미터 높이의 기중기가 친링산맥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다.
국가급 경제개발구인 시안 가오신취(高新區ㆍ하이테크 단지)에 94㎢ 규모의 삼성타운이 들어서는 이번 초대형 프로젝트에 시안은 '축제 분위기' 그 자체다. 시안 남서부의 가오신취로 가는 도로인 진예이루(錦業一路) 가로수마다 수십리에 걸쳐 삼성 로고가 적힌 꽃무늬 장식이 즐비하고 삼성타운 부지가 가까워오자 '삼성과 함께 행복한 미래를 건설하자'라는 입간판이 촘촘히 세워져 있다.
시안시 정부가 삼성 프로젝트에 거는 기대와 희망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가오신취 개발을 총책임지고 있는 자오홍주안 주임은 "삼성 반도체 투자는 시안의 발전에 숫자로 표시하기 어려운 긍정적 작용을 할 것"이라며 "중국 정부가 지속 가능한 균형성장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서부대개발의 중심이 시안이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출범하는 5세대 공산당 최고 지도부에서 총리가 유력시되는 리커창 부총리는 5월 방중한 최지성 미래전략실장 등 삼성그룹 수뇌부와 만난 자리에서 시안 반도체 투자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며 아낌없는 지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에 대한 열기는 중국의 미래 꿈나무가 크고 있는 시안 대학가에서도 그대로 확인됐다. 6월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쏘아 올린 유인 우주선 기술의 요람인 서북공업대를 비롯해 시안전자과기대 등 중국 유수의 공대가 집중돼 있는 곳이 시안이다. 시안은 인구 800만여명 중 대학원생 78만명을 포함해 무려 100만명에 육박하는 대학생을 보유할 정도로 풍부한 우수 인력을 자랑하고 있다. 시안전자과기대의 대학원생인 멍카이씨는 "모든 휴대폰의 60%에 삼성의 칩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특히 이번 삼성의 반도체 투자는 단순 조립공정인 후공정(패키징)이 아니라 웨이퍼를 만드는 핵심 기술인 전공정을 짓는다는 점에서 시안 하이테크 단지 개발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자학을 전공하고 있는 또 다른 대학원생인 차오보씨는 "삼성은 반도체, LCD TV 등에서 세계 일류 기업"이라며 "시안의 삼성 반도체 회사에 꼭 입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삼성이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모니터ㆍ휴대폰 등의 생산법인에 투자한 액수는 2011년까지 총 105억달러다. 한국 기업 중 단연 최대 규모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번 시안 반도체 프로젝트에만 1차로 오는 2013년까지 70억달러가 들어가고 2차ㆍ3차까지 합치면 총 300억달러가 투입되는 초대형 사업이다. 이에 앞서 5월에는 장쑤성 쑤저우에 차세대 8.5세대 LCD 공장을 3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하고 기공식을 갖는 등 2012년은 그야말로 삼성이 중국에서 제2의 창업에 비견될 정도의 대도약을 위한 원년이 됐다.
장원기 중국삼성 사장은 "차세대 LCD와 반도체 등 첨단기술 투자를 통해 2012년은 중국삼성 대도약의 원년이 됐으며 이를 기반으로 중국에 제2의 삼성을 건설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삼성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국에 이같이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과거처럼 원재료나 반제품을 들여와 중국에서 저임 노동력을 활용, 단순 조립 생산해 수출하는 가공무역 방식으로는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수출 전진 기지에서 세계 최대의 내수시장으로 변모하고 있는 중국에 진정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 글로벌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 길이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을 위한 기업으로의 변신이 불가피하다는 전략이다.
중국의 반도체 시장은 이미 2005년부터 세계 최대시장으로 부상했고 휴대폰 등 급성장하는 거대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더욱 큰 시장으로 바뀌어나갈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는 없다. 중국에서 부품조달부터 완제품 생산에 이르기까지 완결형 구조를 완성함으로써 중국의 내수시장을 본격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시안은 중국의 최심장부로 반도체 운송수단인 비행기로 2시간이면 중국 인구 8억명을 커버한다.
중국에 핵심기술을 투자함으로써 중국인의 시장에서 중국과 함께 공생ㆍ공영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보여준 셈이다. 실제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최초로 10나노급 반도체 공장이 시안에 건설된다. 중국삼성 관계자는 "이전에도 쑤저우에 반도체와 LCD 공장을 세웠지만 핵심기술이 아닌 패키징이나 모듈 공정으로 한국에서 핵심부품을 들여와 조립하는 형태였다"며 "이번에 투자하는 것은 반도체와 LCD의 핵심공정인 전공정과 패널 생산 공정으로 투자 규모가 이전과 비교해 수십배에 이른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반도체 프로젝트는 투자 장소로 기존의 중국 동부 연안지역이 아닌 중국 서부 중심지인 시안을 선택한 것이 크나큰 의미가 있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KOTRA 시안 무역관의 김종복 관장은 "삼성의 시안 투자는 중국이 균형성장 발전을 위해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서부대개발 정책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며 "중국의 향후 미래 수십년을 내다보는 중장기 전략적 포석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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