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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처마 떠올리게 하는 지붕, 밖에는 정원 같은 연못 조성
고요하고 아늑한 한국정서도 물씬
가구·소품까지 설계자 보두앵 작품… 국내 최초로 '뮤제오그라피' 실현
어떤 이는 이 건물을 두고 "이응노가 목숨과 바꾼 미술관"이라고까지 평한다. 하얀 벽을 가진 2층짜리 아담한 건물, 눈여겨 보지 않으면 미술관인 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을 법한 소박한 외관. 대전시 서구 둔산대로에 위치한 이응노미술관이다. 대나무와 소나무로 이뤄진 조경이나 작은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터뜨리게 될 감탄사는 나중 얘기다. 이 건물의 묘미는 위에서 내려다본 형태에 있다. 목숨 수(壽) 자. 미술관 설계자인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로랑 보두앵(59)은 존경하는 미술가 이응노(1904~1989)를 기리는 미술관 의뢰를 받고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수(壽)'를 떠올렸다. 실제로 위에서 본 미술관은 목숨 수 자를 그린다. 그토록 간절히 고향을 그리던 이응노는 1989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을 귀국의 계기로 생각하기도 했으나 전시가 개막하던 날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몸은 예술의 대가들이 안장된 파리 시립 페르라셰즈에 묻혀 있지만 그의 영혼이 담긴 작품들은 고향으로 돌아왔고 영원한 쉼터인 미술관에서 관객들과 살아 숨 쉬고 있다. 죽어서야 비로소 고국의 인정을 받았고 그 형상도 목숨 수 자를 그리기에 '목숨과 바꾼 미술관'이라고 하는 이유다.
◇유럽풍 미술관과 한국성의 절묘한 조화=미술관이나 박물관 건물은 권위적이기 쉽다. 이를테면 1·2층을 걸어 올라가야 비로소 그 입구에 들어설 수 있는 구조가 그렇다.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 등이 이 같은 구조를 갖는다. 마치 신전을 향하는 경건함과 엄숙함 같다며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유물이나 예술품을 수집한 설립자의 안목과 권력을 과시하던 중세 박물관의 성격이나 공공성과 교육기능이 강조된 근대 박물관의 위엄과 권위를 대중에게 은근히 주입하는 역할이 숨어 있다. 그래서 현대적 미술관·박물관 건물은 탈권위적이며 개방과 소통을 강조하는 열린 미술관으로 변하는 추세다. 이런 경향을 따르자면 이응노미술관은 단연 으뜸으로 꼽힐 만하다. 잔디밭 산책로를 따라 문턱 없이 그대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입구나 천장과 앞면 전체를 유리로 만들어 건물 안팎이 자연스럽게 소통되는 구조가 이를 반영한다.
한밭수목원을 등지고 대전문화예술의전당·대전시립미술관과 나란히 자리 잡은 이응노미술관은 '산속의 암자'처럼 고요하고 아늑하다. 고암(顧庵)이라는 그의 호처럼 말이다. 미술관을 드문드문 감싼 대나무가 손님을 맞는다. 대나무 또한 이응노의 상징이다. 묵죽으로는 구한말 최고의 서화가였던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애제자 이응노에게 '죽사(竹史·1933년 이전 사용한 호)'라는 이름을 주었을 정도로 그는 대나무 그림에 탁월했다. 그의 등단작인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 또한 '청죽(晴竹)'이었다.
1,700㎡(약 500평)의 연면적이 미술관으로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지하 1층은 수장고, 2층은 사무실로 사용하니 전시공간은 4개의 전시실로 나뉜 1층 600㎡(약 180평)와 야외전시장뿐이다. 하지만 자연채광과 바깥 자연풍광을 한껏 받아들이고 있어 좁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특히 2전시실에서 3전시실로 향하는 복도는 외벽 유리 너머로 연못과 접해 있다. 그 위로는 한옥의 처마를 떠올리게 하는 반복적인 선이 '뚫린 지붕'을 이루고 주변으로는 대나무가 우거져 있어 마치 정원 같은 연못이다. 자연 조경과의 어우러짐을 보노라면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스위스 바젤의 바이엘러미술관이 떠오를 정도다. 설계자 보두앵은 "단아하고 정갈한 공간에서 이응노의 예술에 빠져 사색과 명상을 즐길 수 있는 현대미술을 위한 사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낭시건축대학 교수인 그의 대표작으로 프랑스 카토 캉브레의 마티스 생가를 리모델링한 마티스미술관(2002년) 등이 있다. 게다가 이응노미술관은 국내 최초로 뮤제오그라피(museography)를 실현했다. 뮤제오그라피란 미술관 건물과 전시실뿐 아니라 가구와 소품까지 조화를 이뤄 미술관 전체를 작품화하는 것. 1층 카페테리아의 탁자와 의자, 안내 데스크까지 설계자 보두앵의 작품이다. 미술관 건립비용치고는 '착한 가격'인 59억원에 자체로도 예술품급인 건축물을 얻은 셈이다. 소장품 1,237점 중 98%가 작가의 미망인 박인경 명예관장으로부터 기증 받은 유작이다.
◇유럽인에게 서예 가르치며 한국미의 세계화=한국을 빛낸 세계적 미술가로 백남준을 제일 먼저 떠올리지만 이응노는 그보다 앞서 유럽을 사로잡았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응노는 서당에서 한문과 서예를 배우며 정통 문인화를 익혀 화가가 됐다. 1935년 일본 유학 후 전통 필묵을 사용해 서양식 명암법·원근법을 적용하는 근대적 사실주의를 터득했고 점차 반추상과 완전추상으로 발전시켰다.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와 민족 고유의 한국화를 강조하는 '단구미술원'을 조직하기도 했던 그는 1957년 뉴욕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전' 이후 세계 무대 진출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 당시 그의 작품 '출범'과 '산'은 록펠러재단을 통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기증됐다. 이듬해 55세의 중년인 이응노는 프랑스 평론가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로 건너갔다. 파리의 개인전이 크게 주목받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한 독일 4개 도시의 순회전에서 서독에 처음 소개된 한국 현대미술로 호평을 이끌어냈다. 유럽의 굵직한 미술관이 빠짐없이 고암의 작품을 소장한 것이 이때부터다.
1960년대는 고암의 '기구한 전성기'였다. 그는 1962년에 당시 유럽 최고의 갤러리인 '폴 파케티 화랑'의 전속작가가 된다. 파케티 화랑은 2차대전 이후 미술계를 주도한 앵포르멜(Informel·비정형미술이라는 뜻으로 재료의 물성과 화가의 행위를 강조한 전후 유럽 중심의 추상미술)을 이끌던 곳으로 이응노는 그 중심에서 활동했다. 그때 선보인 작품이 바로 '긁어낸 콜라주'였는데 종이를 평면적으로 붙이던 다른 화가와 달리 그는 붙인 종이를 칼로 긁어내 촉각적 효과와 역동성을 더한 독창적인 작품으로 당시 앵포르멜 추상에 대응하는 동양적 추상으로 이룩했다. 이어 1964년에는 세르누쉬 파리시립미술관 내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했다. 이는 유럽에 설립된 유일한 동양미술 교육기관으로 고암은 한국작가 최초로 유럽인들에게 서예와 사군자를 가르치며 한국화를 보급하고 한국을 알리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파리동양미술학교는 3,000여명의 제자를 양성해 '이응노 화파'를 이뤘고 최근에는 파리 근교에 건축가 장미셸 빌모트가 설계한 고암 아카데미건물이 신축 개관했다. 그러나 1967년 고암은 이른바 '동백림사건(동베를린에서 활동하던 유학생·예술인 등을 탄압한 공안사건)'에 연루돼 2년 반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6·25 때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러 동베를린에 다녀온 것이 빌미가 됐고 그 바람에 한국의 인권문제가 도마에 오른 것은 물론 구명운동을 위해 피에르 술라주, 자오우키 등 세계적 예술인들이 대법원장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창작열은 감옥 안에서 간장과 된장을 재료 삼아 화장지에 그림을 그리고 밥풀과 종이를 개어 조소작품을 만들어 300여점의 옥중화를 남겼다.
프랑스로 돌아간 1970년대의 이응노는 어린 시절 익힌 서예를 토대로 글자의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변형한 '문자추상'으로 또 한 번 도약한다. 말년에는 한 번의 붓질이 사람 형상이 되고 이것이 무한 반복되는 '군상' 시리즈로 예술세계의 대미를 장식했다. 비록 그는 고국 밖을 떠돌았으나 지금은 그의 '군상'처럼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을 드나들며 이응노를 기억한다.
스마트폰으로 작품 설명 듣고… 태블릿PC로 주요 소장품 보고… ■관객과 호흡하는 미술관 최근 '2014년 박물관·미술관 발전 유공 정부 표창'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한 이지호 이응노미술관 관장은 "앱이나 아트상품을 개발하는 것은 젊은 관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자 한 것으로 실제 유행에 민감한 멋쟁이 젊은 관객이 많은 편"이라며 "미술관이 미술관을 홍보할 게 아니라 관객이 직접 경험하고 미술관을 스스로 알리게 하는 시대"라고 말한다. 작고한 미술가를 기리는 미술관은 자칫하면 고루한 유물 전시장이 될 수도 있음을 고려해 관객과 소통하려 애쓴다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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