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미국 대통령선거 민주당 후보 공식 출마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대선의 대결구도는 클린턴 전 장관과 젭 부시(공화당) 전 플로리다주지사의 양자대결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확고해 보였다. 하지만 불과 5개월 후 두 후보의 대세론은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를 차지한 것은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 두 사람이다.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의 대선판을 아웃사이더들이 뒤흔들고 있다." 미국 대통령선거를 1년여 앞두고 지지율이 급상승하고 있는 트럼프와 샌더스 후보의 예상 밖 약진에 대해 미국 언론들이 한목소리로 내리는 평가다. 최근 미국 대선판에서 주목되는 후보들의 면면에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 선거운동 전까지 워싱턴 정가에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 '정치 무경험자'라는 점이다.
이들의 이력은 각각 남편과 형에 이어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정치 귀족' 출신인 클린턴 및 부시와 대척점에 있다. "기존 정치를 쇄신해야 한다고 느끼는 유권자들이 이들에게 새로운 매력을 느끼고 있다(뉴욕타임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 지난달 31일 몬머스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6%가 "미국 차기 대통령에는 기성 정치권 밖의 경험을 한 인사가 당선돼 워싱턴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답했다. 워싱턴 정치에 분노하는 '앵그리 아메리칸'이 미 정치판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표되는 경기침체와 양극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기성 정치에 대한 분노는 '중도' 정치인을 선택해온 미국 유권자들이 '우클릭' 내지 '좌클릭'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선판에 명함을 내민 여러 아웃사이더 중에서도 유독 트럼프와 샌더스가 '돌풍'을 주도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악동 억만장자 트럼프와 사회주의자 샌더스는 각각 보수의 지지를 받는 공화당과 진보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에서도 최극단에 있는 인물들이다.
트럼프의 주요 지지자는 중장년층·백인·남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CNN 정치평론가 빌 슈나이더 교수는 보수 성향의 티파티 지지자 및 65세 이상 공화당원이 트럼프의 지지자라고 분석한다. '여성비하'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온 트럼프의 막말이 백인ㆍ남성 중심의 '옛 미국'을 지향하는 유권자들의 막힌 속을 뚫어주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유권자들이 트럼프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사람' '겁이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트럼프에 대한 지지도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워싱턴포스트와 ABC뉴스가 공동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지지율(공화당 성향 등록 유권자 기준)은 50세 이상(35%)이 49세 이하(31%)보다, 남성(36%)이 여성(29%)보다, 보수층(34%)이 온건ㆍ진보층(32%)보다 높게 나타난다. 특이한 점은 공화당 후보임에도 고소득층보다 저소득층에서 유독 인기가 높다는 것이다. 연소득이 미국 1인당 국민소득(2014년 기준 약 5만달러)보다 낮은 유권자의 지지율(43%)이 높은 유권자의 지지율(29%)을 크게 웃돌았다. 이는 트럼프가 '부자증세' '보편적 의료보험' '보호무역' 등 경제 분야에서만큼은 공화당과 반대되는 진보적 공약을 내세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힐러리 클린턴을 위협하는 샌더스의 주요 지지층은 젊은 유권자, 진보주의자, 전당대회 첫 참석자 등이다. 특히 민주당 내 진보세력의 지지세가 압도적이다. 워싱턴포스트 여론조사에서 샌더스에 대한 진보성향 유권자의 지지율은 32%로 중도성향 지지율(18%)을 크게 웃돌았다. 민주당 내 기득권 세력인 '중도파'에 대한 반발이 고스란히 표출된 셈이다. 샌더스의 정치역정은 젊은 진보주의자의 인기를 끌기에 충분하다. 유대계 노동자 계급 이민자 가정 출신인 샌더스는 2010년 말 부자감세안 통과를 비판하며 8시간 이상 이뤄진 필리버스터로 화제를 모았고 이번 선거에서도 액수제한 없이 합법적으로 대선후보를 지원하는 슈퍼팩을 거부하고 소액모금운동을 벌여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보수세가 강한 버몬트주에서 시장, 하원ㆍ상원의원으로 선출된 것만 봐도 그의 저력을 알 수 있다. 좌파적인 샌더스의 공약도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환심을 사는 요인이다. 샌더스는 "미국은 정치혁명이 필요하다. 억만장자들이 조종하는 미국은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닌 과두제 독재국가일 뿐"이라며 세제개혁과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소득 재분배, 인종차별 철폐, 국영건강보험 도입, 선거공영제 등 유럽식 사회주의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클린턴은 유권자들이 '머리'로 생각하는 후보이고 샌더스는 '가슴'으로 지지하는 후보"라며 샌더스를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비유했다. 오바마가 클린턴을 극적으로 제치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2008년의 역전극이 재연될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트럼프와 샌더스 신드롬은 '중도'가 설 자리를 잃으며 기성 정치에서 힘을 쓰지 못하던 '좌파 아웃사이더'들이 약진하는 글로벌 정치지형과 맞물려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로저 코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이런 현상을 '대중의 극단적인 불만 표출"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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