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깊어갈 이맘때면 어릴 적 먹던 홍시가 생각난다. 잘 익어 터질 듯한 진홍색 감이 반쯤 얼었을 때의 그 맛은 잊기 힘들다. 시골엔 지천에 깔린 게 감나무요, 나무에서 저절로 익는 게 감이지만 온전한 형태의 홍시를 얻어먹기는 쉽지 않다. 감이 익어갈 때면 새나 벌레들이 먼저 입을 댄다. 용하게 이를 피해 홍시가 돼도 떨어지면 온전할 리가 없다. 제대로 홍시를 만들려면 농익기 전에 감을 따서 잘 보관해 숙성해야 된다.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기다린다고 제대로 된 홍시를 맛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이를 빗대 숙시주의(熟枾主義)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을 비웃는 말이다.
요즘 한국 경제를 보면 걱정이 앞선다. 각 예측기관마다 내년도 3.8% 내외의 경제성장률 전망을 내놓았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되물을지 모른다. 문제는 한국 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2009년 이래 지난 5년간의 평균 경제성장률이 3%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을 3.7% 정도로 본다면 잠재력 수준의 경제성장도 못하고 있는 셈이다. 개도국의 높은 성장률은 차치하고라도 세계 경제의 평균 성장률이라도 따라갔으면 좋으련만 이제는 이도 벅찰 지경이다. 한국 경제가 장년기를 즐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노인이 된 듯한 느낌이다.
내년의 최대 당면과제는 저성장의 늪에서 탈출하는 일이다. 성장은 때를 놓치면 다시 기회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부분 2014년 경제를 좋게 보는 출발점은 대외경제 여건의 회복이다. 우선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를 전격적으로 단행한 것에서 보듯이 경기 회복이 탄탄하게 이뤄지고 있다. 여기다 유로존이 오랜 마이너스 성장에서 드디어 1%대의 성장으로 돌아섰다. 일본도 불안하긴 하지만 장기간의 디플레이션에서의 탈출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선진국들이 오랜 침체에서 탈출을 시도하고 있어 한동안 어려웠던 수출이 좀 살아날 걸로 보인다. 크게는 연 10%대의 증가율을 보이던 수출이 2012년엔 -0.3%, 올해엔 3% 내외의 증가율에 불과했다. 이 수출이 2014년에는 8% 이상으로 늘어날 걸로 전망하고 있다.
수출경기의 회복 여부는 설비 투자의 바로미터다. 수출이 부진하던 2년 연속 설비 투자도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했었다. 국내총생산(GDP)의 10% 가까이를 차지하는 설비 투자가 이 모양이니 경제성장률의 발목을 잡을 뿐 아니라 새로운 일자리 또한 만들어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내년엔 늘어나는 수출을 지속하기 위한 기업의 재투자와 보완 투자가 설비 투자 증가율을 6%대로 회복시켜줄 것으로 본다. 내년도 3.8% 경제성장률의 전망은 이러한 경기의 선순환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우려스럽게 만드는 것은 지난 1년 내내 이어지는 여의도 정치권의 구태, 수위를 높여가는 시청 앞 갈등의 모습, 통상임금 판결과 정년연장 등으로 힘 빠진 기업의 모습, 늘어나는 대학가의 대자보들이다. 과연 우리가 내년의 우호적인 대외환경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을는지가 의문이다. 지금 각국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기업을 살리기 위한 치열한 경제전쟁의 와중에 있다. 어쩌면 예전보다 더 정교한 정부의 역할, 지도자의 역할이 필요한 시기이다. 선진국 진입을 위한 도약의 발판을 만들려면 우리 산업을 지키며 기업을 살려내고 우호적인 투자환경을 만드는 일을 더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경제가 저절로 살아나지 않는다. 온전한 홍시를 얻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다. 벌레를 잡고 까치를 쫓으며 나무에서 따서 숙성하는 수고가 있어야 가능하다. 나무에서 저절로 익은 홍시는 내 입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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