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감이 없는 백은 실전보의 백54로 살자고 했다. 흑55는 예정된 수순. 계속해서 백62까지의 수순은 정말로 기막히다. 백으로서는 뼈를 깎는 고통과 수모의 연속이고 흑으로서는 득의 만만이다.
기분이 상하면 즉시 돌을 던지는 일본의 오타케9단이 아니라도 이런 장면에서는 대개의 프로기사들이 돌을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고근태는 돌을 던지지 않고 이 모든 수모를 묵묵히 감수했다. 실로 엄청난 극기요 인내여서 필자는 고근태가 굉장한 인격자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패배가 확실해진 바둑을 묵묵히 두어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심한 고행인가를 필자는 안다.
검토실에서 실전보의 백54로 굴복하지 않고 참고고1의 백1로 쑥 나와버리는 강경책이 없었느냐는 말이 나왔다. 흑4의 팻감을 외면하고 백5로 해결하면 어떻게 되는가. 결론은 이 코스가 역시 백의 무리라는 것이었다. 흑6 이하 16으로 좌변의 백대마가 희생되는 것이다.
또 하나. 이 그림의 백7로 참고도2의 백1에 물러서는 방책은 없었을까. 이것 역시 A와 B가 맞보기가 되어 백이 무너진다는 결론이 나왔다.
우리의 인격자 고근태도 돌을 던지기는 던졌다. 모든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는 돌을 던졌다. 그 시점에서도 돌을 던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격이 아니고 바둑도 아니고 그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것이므로. 이렇게 해서 강동윤은 또 하나의 타이틀을 따냈다.
(59…56의 왼쪽. 185수끝 흑불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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