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왕이 안전을 담보하지 못해 남의 나라 공관에 숨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지난 1896년 일어났다. 고종이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이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이웃 나라에 사례가 있기는 하다. 1925년 중국 베이징에서 선통제 푸이가 국민혁명군에게 쫓겨나 일본 영사관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사건 발생 13년 전에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고 당시 명목상 자금성에 있었을 뿐이다. 고종은 현직 국왕이었다. 군대와 관료 시스템도 작동하고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자 같은 꼴을 당할까 불안에 떨던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뒤의 순종)까지 데리고 러시아 공사관에 틀어박힌다. 그리고 1년여를 머물렀다. 조선의 국권 상실은 1905년이 아니라 1896년에 일어난 것이다. 이제는 누가 임자가 되느냐를 두고 청일전쟁에서 중국(청)을 물리친 일본과 고종을 움켜쥔 러시아가 경쟁하게 된다. 이는 결국 러일전쟁으로 이어진다. 사진은 구(舊) 러시아공사관이다. 벽돌로 된 2층 건물이었는데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지금은 3층짜리 탑 부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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