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사이너(Robo-signer). 요즘 미국 사회에서 최고의 핫이슈인 이 말은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주택압류 문서에 사인하는 사람'을 뜻한다. 미국 대형은행들과 모기지(주택담보대출)업체들은 주택압류 절차를 진행할 때 이러한 로보사이너를 채용(?)했다. 미 최대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한 직원은 하루에 무려 8,000여건의 주택압류 문서를 처리해 법원으로 넘기기도 했다. 은행들의 이러한 날림 행위는 주택압류 과정에서 불충분한 서류검토 등 온갖 결함을 낳았고, 이는 거리로 내앉게 될 위기에 처했거나 이미 쫓겨난 수백만명의 미국 시민들을 폭발시켰다. 중간선거를 코 앞에 둔 버락 오바바 정부는 이 문제를 좌시할 수 없었다. 지난 14일 미국 50개주 검찰이 주택압류 부실심사 문제에 대한 합동조사에 들어간 이후 각 주의 법원과 연방수사국, 연방예금공사,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까지 가세했다. 이에 대부분의 미 은행들과 모기지업체들은 서둘러 주택압류를 잠정 중단한 채 사태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사정의 칼'이 미국 시민들의 분노를 달래줄 수는 있어도 주택시장의 실질적인 회복에는 장애물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주택시장 회복을 위해서는 정당한 주택압류를 통한 구조조정을 지속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인위적으로 막고 있다는 것이다. 차압 물량은 시세보다 30%가량 헐 값에 팔리는데, 이런 악성재고주택이 소진되기 전까지 주택시장의 회복은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택 4채 주 1채가 차압주택인 암울한 현실을 감안하면 미 주택시장은 더블딥(이중침체)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일부에서는 고용시장 침체의 지속으로 미국인들의 소득원이 차단된 현 상황에서는 모기지 원리금의 탕감과 법 개정 등 강도 높은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혼란의 미 주택시장 = 그야말로 주택차압 대란이다. 압류주택 매매 중계업체인 리얼티트랙에 따르면 지난 9월 미국의 주택압류는 10만2,134건을 기록, 월간 기준으로 사상 처음 10만건을 넘어섰다. 압류주택은 올 들어 9월까지 81만채를 넘었으며 연말까지 120만채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주택시장 회복에 차압물량이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주택시장 회복은 2013~2015년 이후로 내다보고 있다. 미국 모기지은행협회(MBA)는 주택시장 거품붕괴 이후 지금까지 620만채의 집이 압류됐으며 오는 2012년까지 350만채가 더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전체 모기지 가운데 상환을 3개월(90일)간 연체한 비율은 올 들어 10%를 웃돌고 있다. 미국에서는 보통 모기지 원리금을 60~90일간 갚지 못하면 주택압류 경고를 받는다. 이러한 주택차압 대란의 상황에서 BoA와 JP모건, GMAC 등 금융회사들의 부실심사 문제가 불거지자 미 정부는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나섰다. 대형은행과 모기지업체를 대한 공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형 투자자들은 이들 은행에 부실 모기지 증권의 환매를 요구하며 압박하고 있다. 일부 시민들은 항의 표시로 주택압류가 결정돼도 집을 떠나지 않는 이른바 '버티기'에 나서고 있다. 미 뉴욕연방준비은행과 세계 최대 채권회사인 핌코, 보험사인 메트라이프는 지난 19일 BoA에 공동으로 서한을 보내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총 470억달러 규모의 모기지 증권을 되살 것을 요구했다. 이들 투자자는 "모기지 대출자의 소득수준과 (주택) 감정가격에 대한 과장이 있었다"며 법적 근거를 제시했다. JP모건과 씨티그룹, 웰스파고 등도 이 같은 압박을 받고 있어 미 주요 은행들의 모기지 증권 상환규모는 최대 2,200억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 주택시장의 회복 방해 = 미국에서 지난 2ㆍ4분기 판매된 주택 4채 중 1채가 압류주택 등 부실 부동산으로 집계됐다. 미 주택시장에서 압류주택의 수급문제가 중요한 까닭이다. 정부가 사정기관을 총동원한 조사에 들어가면서 주택압류 건수는 당분간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주택압류는 재개될 것이다. 주택시장 전문가들은 나중에 압류주택들이 일거에 쏟아져 나와 가뜩이나 낮은 주택가격을 더욱 떨어뜨리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미 주택가격(S&P/케이스ㆍ실러 지수 기준)은 지난 4월부터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지난 7월부터 다시 하락세로 돌아섰다. 이를 두고 미 주택시장은 이미 더블딥(이중경기침체)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 국민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금융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것도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주택압류과정에 대한 소비자보호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존 매덕스 씨는 "은행들은 압류에 속도를 내기 위해 법을 어기기도 했다"며 "은행이 이처럼 약속을 안 지키는 데 대출자들은 약속을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FT는 "신용상태가 좋은 대출자들은 계속 상환을 잘 할 것"이라면서도 "만약 이에 변화가 생기면(상환을 잘 하지 않으려 하면) 금융시스템에 새로운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미 국민들이 주택구입을 위한 모기지 신청을 꺼리게 되면 정부는 그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까 우려하고 있다. 미 정부는 FRB를 통해 총 1조7,500억달러를 들여 미 국채와 모기지 증권을 사들여 현재 장기모기지(30년물) 금리를 역대 최저수준인 4.4%대로 유지하고 있다. MBA는 26일(현지시간) 올해 1조4,000억달러로 예상되는 모기지 총 규모가 내년에는 1조달러 미만으로 떨어져 지난 1996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채무조정 등 대책 필요 = 주택압류 부실심사 문제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지만 새로운 위기의 불씨로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워싱턴포스트는 "은행들은 법적소송에 따른 손실을 견딜 수 있으며 이번 문제가 주택시장과 전체 경제에 폭넓은 위기를 불러올 것 같지는 않다"고 내다봤다. 무디스애널리틱스의 마크 잰디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주택시장의 진짜 문제는 높은 실업률과 경제 전반의 불확실성"이라며 수요부족 문제를 언급했다. 이번 주택차압 대란에 대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와 관련, 미 은행들이 이번 사태의 해결을 위해 큰 폭의 양보안을 내놓을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모기지 컨설팅회사인 럼슨은 은행들이 모기지 원금 축소를 포함한 관대한 채무조정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사설을 통해 "의회는 파산법을 개정해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대출자들이 은행에서 채무조정을 거절당했을 때 법원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정부와 의회가 (주택차압 문제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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