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레임덕'이라는 단어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단체가 있다. 다름 아닌 산업계가 그중 하나다. 얼마 전 만난 재계 고위임원은 딱 잘라 "산업계에 대통령 레임덕은 없다. 임기 만료가 바로 코앞에 닥쳐도 우리(산업계)에게 정치권력은 항상 무서운 존재"라고 말했다.
정치권력에 대한 산업계의 두려움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커졌다. 삼성전자ㆍLG전자ㆍ현대자동차ㆍSK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이 덩치가 커진 데 따른 것이다. 워낙 규모가 커지다 보니 회사를 완벽히 관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사고(?)가 터질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그만큼 정치권력이 특정 기업의 숨통을 조이려고 마음 먹으면 예전보다 단초를 찾는 것이 더 쉬워진 것이다.
공직에 몸을 담고 산업계로 자리를 옮긴 전 고위공무원은 "막상 기업인이 돼보니 정치권력이 무섭다는 것을 느낀다"며 "기업이 규모가 커지고, 영위하는 사업분야가 다양해지다 보니 예전보다 더 정치권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요즘 핫 이슈로 부상한 대ㆍ중소 상생은 이 같은 현실을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상생협력을 위해 대기업이 노력해야 하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공정거래위원회 등 여러 곳에서 제도적ㆍ법적 장치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 말 한다미에 마치 기업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대책을 내놓고 있다. 이렇다 보니 산업계에는 '상생 스트레스'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대통령이 언급했으니 대책을 안 내놓을 수 없다. 그렇다고 대책을 잘못 내놓으면 오히려 욕을 먹는다. 대책을 내는 것 자체가 자칫 '그간 상생협력에 소홀했다는 것'을 스스로 천명하는 계기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기업이 발표한 상생대책은 이 같은 고민이 만들어낸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기여는 굳이 대통령의 발언이 아니더라도 기업이 스스로 느끼고 있다. 사회적 책임과 기여에 소홀한 기업에 대해 국제 사회가 불이익을 주자는 국제협약도 곧 시행을 앞두고 있다. '산업계도 레임덕이라는 사치를 누려봤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재계 한 고위임원의 발언이 새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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