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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살리자] <1>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

10만명당 32명 자살 OECD최고… 생애주기별 예방책 세워야<br>성장 제일주의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이 원인… 국가 손실 연3조 달해<br>자살예방 예산 연50억… 일본의 40분의1 불과… 위험군 범위도 확대를

서울시가 자살 예방을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마포대교 난간에 설치한 동상을 한 시민이 어루만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관련 예산을 대폭 늘리고 생애주기별 예방 대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울경제DB


"매형에게. 매형이 오실 때쯤이면 당신의 여동생인 제 아내와 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병마와 씨름하던 아내는 얼마 전 시한부 판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아내와 함께 죽을 것이라고 말해왔는데 이제 그날이 온 듯합니다. 병마에 고통스러워 하는 아내를 더 이상은 보기 힘들고 일흔이 넘은 저 때문에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가족들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을 하고 결정한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박형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이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1,300여건의 자살사례와 400여건의 유서를 분석해 엮은 저서 '자살, 차악의 선택'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유서만 따로 모아도 책 한 권은 거뜬히 펴낼 수 있다는 사실은 한국이 얼마나 자살로 얼룩진 국가인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관련 통계 역시 우리나라가 자살 공화국임을 입증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21일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는 2000년 13.6명에서 2011년 31.7명으로 11년 동안 2배 이상 증가했다.

성별로 보면 같은 기간 여자는 8.3명에서 20.1명으로 11.8명 늘었고 남자는 18.8명에서 43.3명으로 무려 24.5명이나 급증했다.

이처럼 압도적인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회원국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 수준이다. 일본과 스웨덴이 각각 21.2명, 16.9명으로 그나마 높은 편이고 포르투갈(9.3명), 스페인(6.3명), 이탈리아(5.9명), 그리스(3.2명) 등 10명도 채 안 되는 국가들이 즐비하다.

더구나 OECD가 1990년부터 2006년까지 회원국을 대상으로 자살 증가율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여타 회원국의 경우 자살률이 평균 20.4% 감소한 반면 한국에서는 172.2%나 증가했다.

특히 10~14세의 경우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간 자살 증가율이 무려 329%에 달했으며 20대 이상 전 연령대에서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165~262%의 증가율을 보였다.

이처럼 OECD 국가와 비교해 유달리 높은 수치와 관련해 국내의 자살 문제를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화적인 현상의 하나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들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단기간에 급속도로 산업화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성장 제일주의가 높은 자살률의 1차적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성장 제일주의에 기반한 빡빡한 경쟁 시스템이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면서 자살률 역시 덩달아 치솟고 있다는 것이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는 "2011년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KAIST 학생들의 연쇄 자살 사례는 상대적 박탈감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며 "한강의 기적을 뒷받침했던 성장 제일주의가 부메랑이 돼 자살을 부추기고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윤 교수는 이어 "힐링이라는 말이 요즘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우리의 감성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반증"이라고 지적했다.

가족이 함께 목숨을 끊는 동반자살 역시 한국적인 현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박형민 부연구위원은 "동반자살은 가족이나 동료 간의 유대관계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가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왜곡돼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정부는 2011년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을 처음 제정하는 한편 2004년부터 자살예방을 위한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시행 중이다. 자살 위험군의 분류와 관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협력체계 강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오히려 자살률은 상승 곡선만 그리면서 역부족에 그치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자살 관련 정책에 대해 위험군 관리의 범위가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현재 정부는 응급실 입원 환자 가운데 자살 시도를 한 차례 이상 한 적이 있는 사람들을 자살 위험군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광자 이화여대 간호학과 교수는 "자살은 전염성이 강력한 행위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자살 유가족들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며 "탤런트 최진실·최진영씨와 야구선수 조성민씨의 연이은 자살이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턱없이 부족한 예산 문제도 하루빨리 해결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현재 우리나라의 자살 관련 예산은 연간 50억원 정도에 불과하다. 정부 정책을 실질적으로 집행하는 역할을 하는 중앙자살예방센터 예산이 21억원이며 시군구 단위별로 자살예방센터 기능을 하는 189개 기초정신건강증진센터의 총 예산이 15억원 남짓이다. 한국만큼 자살률이 높은 일본이 연간 2,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인 셈이다.

박종익 중앙자살예방센터장은 "예산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밤길 걷기 운동' 등의 이벤트성 행사가 난무하는 것"이라며 "위험군 확대, 생애주기별 예방책 강화 등의 정책을 통해 자살률을 감소시키려면 예산의 대폭적인 증액이 우선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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