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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쑤성(甘肅省) 둔황(敦煌)에서 동쪽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 내지로 들어오는 길은 온통 사막에 가까운 황무지다. 드문드문 마른 땅에 잡초들이 자랄 뿐 들판에는 아무것도 없다. 만리장성 서쪽 관문인 가욕관(嘉峪關)은 사막이 끝나는 지점에 갑자기 나타난다. 가욕관을 지나면 풍경이 푸르러지며 도시와 마을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명나라가 만리장성의 끝으로 가욕관을 삼은 이유를 알겠다. 실크로드의 가욕관이 농경지역과 유목ㆍ사막지역의 경계선인 셈이다.
중국의 영토는 시대에 따라 큰 변화를 겪었고 그들이 생각하는 국경도 바뀌었다. 기원전 3세기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나라의 서북쪽 국경은 대략 지금의 란저우(蘭州)에서 그쳤다. 하지만 기원전 2세기부터 한나라가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와 대결하는 과정에서 서역공락에 나섰고 그 결과로 지금의 간쑤성 서부인 허시후이랑 지역을 정복하게 된다. 허시후이랑을 따라 길게 장성을 쌓았는데 대략 서쪽 끝은 둔황 외곽에 있는 양관과 옥문관이었다.
한나라가 망하고 위촉오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내전이 시작된다. 이어지는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북방 중앙아시아 이민족과 한족들이 섞이면서 장성은 거의 무용지물이 됐다. 중국을 통일한 선비족의 수ㆍ당 시대에는 재팽창에 나서면서 장성 너머까지 영토를 넓혔다.
만리장성이 다시 중국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14세기 이후 명나라 때다. 명나라는 이민족 몽골족을 북방으로 밀어냈지만 과거 한나라나 당나라 때처럼 완전히 복속시키지는 못했다. 즉 북쪽 유목민, 남쪽 농경민이라는 전통적 구도가 복구된 것이다. 이에 장성을 강화해 방어력을 키우자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되살려냈다. 6,700여㎞에 달하는 지금의 '만리장성'의 마지막 골격이 이뤄진 것은 명나라 때다. 가욕관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다.
한나라 때처럼 둔황이 만리장성의 끝이 되지 못한 것은 정치ㆍ경제상의 변화 때문으로 보인다. 둔황은 중국 쪽에서 중앙아시아로 팽창할 경우 그나마 괜찮은 마지막 오아시스 도시다.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무제는 서역공락에 나서면서 둔황을 거대한 전진기지로 키웠다. 대외팽창을 위해서는 최적의 위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4세기 중화제국 명나라의 기본적인 대외 기조는 쇄국이었다. 이른바 중화사상으로 무장하면서 극단적인 이민족 배척에 나섰다. 특히 당시 이슬람세력이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급격히 팽창하자 이를 막기 위해 허시후이랑에 대대적인 방어시설을 구축했다. 즉 가욕관은 방어를 목적으로 만든 성채다. 해자와 외성ㆍ내성의 3중 방어시설을 가졌으며 내성의 경우 성벽 높이가 11m, 길이가 730m다. 명나라가 건국된 직후인 1372년에 건설을 시작해 1540년에 현재의 모습이 완성했다고 한다. 명나라는 한나라 때 하서4군 가운데 하나였던 둔황 같은 오아시스 도시는 포기하고 농경이 가능한 지역을 자국의 영역으로 여겼다. 가욕관 안쪽의 주취안(酒泉)이나 장예(張掖), 우웨이(武威) 등을 지키자는 전략이다. 명나라는 가욕관을 서쪽 끝으로 해 장성을 재구축했다. 역사상 동서교역의 중단과 실크로드의 폐쇄는 명나라 때인 1524년으로 기록된다.
중국사에서 군사용으로서의 만리장성의 기능은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끝이 났다. 북방민족의 일원인 만주족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하면서다.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만리장성이 필요 없었다. 오히려 중앙아시아나 몽골 정복에 걸림돌이 되는 귀찮은 존재였다. 사막 한가운데 건설된 순전히 군사용 성채인 가욕관의 경우 그 효용이 떨어지자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떠나갔고 도시는 순식간에 황폐해졌다. 성곽이 재발견된 것은 19세 초 고대유적으로서다.
가욕관을 처음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적지 않게 당황해 한다고 한다. 만리장성 서쪽 끝, 사막 가운데 솟아 있는 외로운 성채 유적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현재 가욕관은 거의 관광지다. 성곽 남쪽에는 큰 호수까지 파놓았다. 또 가욕관을 둘러싸고 도시가 발달했고 가욕관에서 이름을 따 자위관시(嘉峪關市)로 불린다. 자위관시는 중국 내 주요 철광석 매장지면서 망간ㆍ동ㆍ금ㆍ석회석 등의 산지다. 시내에는 하루 종일 공사차량들이 휘젓고 다닌다. 시끄럽고 먼지 많은, 중국의 전형적인 공업도시다. 이런 공장지대를 거쳐 가욕관 경내로 들어서기 때문에 실크로드를 거쳐온 여행객이나 답사객들은 당황하게 되는 셈이다.
자위관시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만들어진 전형적인 신도시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 공업도시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자위관시가 도시 형태를 갖춘 것은 1958년 당시 주취안철강(酒泉鋼鐵公司)이 지금의 자위관시에 건설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후 광산개발이 늘어나면서 1965년 자위관시로 승격했고 이후 경제성장과 함께 급격히 덩치를 키웠다. 2011년 기준 인구 30만명이다. 쇄국정책의 상징이었던 서쪽 관문 가욕관이 개혁개방 이후 경제개발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는 현대 중국의 상징인 자위관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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