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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盜聽의 종착역
입력2005-09-29 17:05:00
수정
2005.09.29 17:05:00
열사의 나라 수도의 한 입찰장. 한국인들의 환호성이 울렸다. 수십억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따냈기 때문이다. 수주 성공의 밑바탕에는 토목공사 기술력이 깔려 있었지만 비결은 따로 있었다. 입찰자가 마련해놓은 예정가를 정확하게 파악했기 덕분. 입찰정보 획득에는 한국이 보유한 도감청 기술이 모두 들어갔다. 다른 나라 기업들과의 경제 첩보전에서 승리한 셈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지난 70년대 중후반.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얼어붙고 있었다. 세계 양강은 두 가지 사안에서 맞붙었다. 첫번째는 핵무기 경쟁. 인류종말 직전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소련은 미사일 경쟁에 매달렸다. 핵 경쟁은 결국 군축협상으로 고삐가 잡혔으나 두번째 경쟁은 보다 치열하게 전개됐다.
국가이익 위한 도청은 필요
바로 도청 경쟁이다. 도감청 전쟁의 외형은 대사관 확충.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와 워싱턴에 주재하는 자국의 대사관을 확충하는 레이스를 펼쳤다. 신형 감청설비를 들여놓기 위해서다. 소련에서는 미국대사관 근처에 대형 건물을 지어 일부러 전파 사각지대를 만들기도 했다. 소련이 해체된 지금까지도 도감청 경쟁은 여전하다. 입찰정보를 얻기 위한 기업의 감청에서 국가기밀을 파악하려는 스파이 전쟁에 이르기까지 도감청은 국제경쟁의 강력한 무기다. 도청이나 감청, 암호해독이 국운을 좌우했던 사례는 무수히 많다. 태평양전선에서 미군이 나바흐족 인디언을 통신병으로 동원하는 내용의 영화 ‘윈드토커’의 소재도 ‘감청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전한 통신’이다.
국내 정치판도 도청 논쟁이 한창이다. ‘X파일’에서 2002년 도청문건까지 도청을 빼놓고는 한국의 정치를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중요한 것은 ‘도청의 생산성’이다. 도청 행위가 국가와 국민경제 발전에 얼마나 이바지했냐는 잣대로 볼 때 한국에서의 도청에 매길 수 있는 점수는 빵점(0)에 가깝다. 오랜 기간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도청의 목적이 정권의 안위에 있었던 탓이다. 이 대목에서 도청의 수요와 공급을 따져보자. 도청의 발주자, 즉 수요자가 군사정부에서 민주정권으로 바뀌면서도 정치 사찰과 도청의 습관은 끊기지 않은 모양이다. 한심하다.
공급 측면은 더욱더 한심하다. X파일과 2002년 도청 문건의 유출과정에는 공통점이 두 가지 나온다. ‘부도덕’과 ‘알아서 기었다’는 점이다. 미림팀 정보의 유통과정을 보면 국정원의 일부 전현직 직원들이 과연 국가의 핵심기밀을 다루는 정보기관 소속 공무원이었는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다. 국가가 아니라 정권의 안보를 위해 통치권을 남용한 위정자와 개인적 안위를 위해 기밀을 빼돌린 국정원 직원들의 행태는 꼭 닮았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다 썩었다’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도청의 수요와 공급, 동시 처벌해야
2002년 도청 문건도 마찬가지다. 당시 문건을 폭로했던 한나라당 의원들은 ‘거 봐라’는 식으로 당당하다. 국정원이 부인했던 내용이 3년 만에 사실로 밝혀졌으니 그럴 만하다. 하지만 간과하는 게 있다. 2002년 도청 건의 내용과 과정을 밝히는 것 못지않게 문건이 유출된 이유와 경로를 따져야 한다는 점이다.
야당 후보의 당선을 대세로 여기던 시절, 국정원 직원들이 유력 후보의 측근에게 앞 다퉈 정보를 제공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정원 직원들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저버리고 ‘알아서 바치는’ 정보를 받아 활용한 행위도 문제다. 여야를 떠나 정치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정치권력을 동원해 불법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불법 도청의 수요와 공급에 연대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
남은 것은 미래다. 도청 파동을 거치면서 국가정보기관이 불법 도청을 떨쳐낼 수 있다면 최근의 논쟁과 혼란 양상은 오히려 자산이 될 수 있다. 불법 도청, 정치 사찰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수요와 공급 어느 쪽에서든 흐름이 차단돼야 한다. 정치인들도 환골탈태해야 하지만 국정원을 비롯한 공무원들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길이 과제로 남았다. 입찰 전쟁과 각국의 도청 경쟁에서 보듯이 합법적, 국가적 이익 증대를 위한 도청은 오히려 장려돼야 한다.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도 정치 공방과 소모전이 계속된다면 이 나라의 장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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