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로 예정됐던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나흘 앞둔 21일 북한이 갑자기 상봉행사를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하자 상봉을 앞둔 이산가족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한결같이 할말을 잃었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이번 추석연휴가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웠던 만큼 실망감도 컸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형을 만날 예정이던 경남 사천시 대방동에 사는 김연주(78) 할아버지는 이 같은 소식을 듣고 절망감에 빠졌다.
김 할아버지는 이번 상봉행사에 북측이 의뢰한 200명의 명단 중 김봉기(80)씨가 찾는 동생으로 확인돼 남측 최종명단에 포함되는 행운을 얻었다.
김씨의 부인 탁형이(77)씨는 "남편이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죽은 줄 알았던 형이 찾는다는 연락받고 무척 좋아했다"며 "남편이 형을 만나러 간다는 기대가 컸는데 갑자기 상봉행사를 연기한 북한이 원망스럽다"고 실망감을 드러냈다.
어부인 아버지 슬하에 7남매 중 셋째인 김 할아버지는 6·25전쟁 직후 사천ㆍ삼천포 일대를 인민군이 점령하면서 형 봉기씨가 인민군에게 끌려가면서 이산가족이 됐다.
이후 김 할아버지는 수소문 끝에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50여 년간 제사를 지내왔다.
창원시 의창구 동읍에 사는 류영식(91) 할아버지도 상실감이 컸다. 류 할아버지는 이산가족 남측 최종명단 96명에 포함돼 형 홍섭씨의 딸 옥순·옥선씨를 만나기로 돼 있었다.
류씨의 아들 천일(55)씨는 "사촌들에게 줄 선물 등 금강산에 갈 준비를 모두 다 해놨는데 갑자기 상봉행사가 연기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추석에 가족이 모여 금강산 상봉행사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갑작스러운 상봉행사 연기 소식에 아버지께서 실망감이 크다"며 "빨리 남북관계가 정상화돼 다시 날짜가 잡히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고 말했다.
북한의 남동생을 만날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이명한(88·홍천군) 할머니는 상봉 연기 소식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남동생 이광한(69) 씨를 만난다는 소식에 추석연휴 내내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밤잠도 설친 이 할머니였다. 남동생에게 줄 속옷과 생필품 등의 선물 꾸러미를 '쌓아다 풀었다'를 몇 차례 반복하며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북에 있는 가족이 그리워 자신의 두 딸 이름마저 이북(李北), 이남(李南)으로 지은 이효국(90) 할아버지도 상봉연기 소식을 듣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이 할아버지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다가 지난 16일 90세가 되어서 처음으로 상봉 가족 명단에 올라 더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번에 만날 사망한 2명의 남동생의 자녀들에게 줄 선물도 이미 사 놓았다.
이씨의 부인 김순이(79)씨는 "건강이 악화됐던 남편이 이산가족 상봉 명단에 포함됐다는 소식을 듣고 기력을 회복했다"면서 "이렇게 기약 없이 상봉이 연기됐으니 다시 건강이 악화하실까 봐 걱정이 된다. 꼭 좀 대화가 잘 돼서 예정대로 만나러 갔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한편 북녘에 있는 딸, 누나, 남동생과의 상봉을 앞두었던 김영준(91)씨가 19일 오후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 자택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숨져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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