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익 없는 성장은 회사를 수렁에 빠뜨릴 뿐입니다. 기업이라면 단돈 1원이라도 수익을 내야 합니다."
서울 여의도 한진해운 건물 13층 집무실에서 처음 만난 김경규(53ㆍ사진) LIG투자증권 대표는 마치 옆집 아저씨 같은 온화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17년 이상 영업맨의 길을 걸어온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기업은 반드시 수익을 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 배어 있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기업이 수익을 내야 직원들도 힘이 나고 그것이 다시 회사 발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반대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직원과 회사는 우울증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자기 회사, 자기 사업부에 적자가 나면 직원들도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영업을 시작한 후 석 달 만에 이익을 내고 나니 직원들이 자신감을 가지게 됐습니다. 역시 단돈 1원이라도 좋으니 돈 버는 회사를 만드는 게 최고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최근 그가 조직의 확장보다 내실 다지기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난달 LIG투자증권은 10개에 불과한 지점을 8개로 줄였다. 김 대표는 지점축소 역시 성과에 중점을 둔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직원들도 실적이 좋지 못한 지점에 있기보다 고객들이 많이 찾는 지점으로 가는 것을 선호한다"며 "지점 대형화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확신에 몇 안 되는 지점 수를 줄였고 회사와 직원 모두 만족하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대표의 수익에 대한 애착은 인생행로와 무관하지 않다. 김 대표는 평사원으로 입사해 증권사 수장에까지 올라 여의도 샐러리맨들이 우상으로 여기는 인물이다. 특히 무려 17년간 지점과 본점에서 영업직원 생활을 하며 쌓은 경험은 '수익은 왕'이라는 믿음의 초석이 됐다.
김 대표가 영업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30년 전인 대학생 시절.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영업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 분야로 나가면 성공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계기는 아주 단순했다. 지난 1979년 겨울방학 기간에 그는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영어와 일본어 회화 테이프를 판매하는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아침이면 사무실에서 판매교육을 받고 기업인 명부를 보고 전화를 했다. 당시 시가는 일본어 테이프세트가 4만원, 영어 테이프세트는 5만원이었다.
김 대표는 "석 달 동안 총 57개를 팔았으니 토요일과 일요일 빼고 하루에 하나씩 판매한 셈"이라며 "아르바이트생이 20명 남짓 됐는데 당당히 판매왕에 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2등을 한 친구가 7개를 팔았고 1개 이상 판매한 사람이 절반도 채 되지 못했으니 그때부터 내가 영업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세트를 팔면 1만원을 인센티브로 받았는데 요즘 화폐가치로 따지면 20만원쯤 될 것"이라면서 웃었다.
LG그룹 회장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김 대표는 사실 우연한 기회로 증권업계에 발을 내디뎠다. 김 대표는 "회장실에서 4년 정도 근무하면 계열사로 전출돼야 했는데 결혼을 좀 일찍 한 편이라 대부분의 계열사들이 지방에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며 "그런데 때마침 1989년 코스피지수가 처음으로 1,000포인트를 찍는 등 증시가 호황을 이루자 증권사들이 지점 확장에 사활을 걸게 됐고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생각에 LG증권으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20년 가까이 법인영업에서 일했지만 김 대표의 첫 보직은 투자은행(IB)팀. 법인영업 부문으로 가게 된 사연도 남다르다. 김 대표는 1991년 기획팀에 있을 당시 건강검진 결과 지방간이 나와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마포에 있는 스포츠센터에 등록했다. 당시 그 스포츠센터에는 예전에 주요 투자신탁회사 운용본부장, 한국이동통신 사장, 국회의원 등 많은 유명인사들이 회원으로 있었다. 김 대표는 "같이 운동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친해지자 법인영업 쪽에서 저한테 막 부탁을 했다"며 "그때 3투신 운용본부장이면 증권사 사장들도 만나기 힘든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스포츠센터의 인맥으로 법인영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셈이다.
여의도에서는 김 대표를 영업의 달인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유를 물어봤다. 그러자 김 대표는 '끈기'라는 단어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끈기는 자신감과 부지런함, 그리고 고객 중심의 사고가 결합돼 나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어떤 일이든 고객을 위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해야 한다"며 "고객에게 정확한 투자정보를 주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더 많이 알아야 하고 직접 발로 뛰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끈기는 고객을 위한다는 자부심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된 일화를 묻자 그는 13년 전 가장 힘들었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99년 LG증권 법인영업부 팀장으로 현장에서 뛰었던 김 대표는 한 대형 증권사로부터 450만주의 자사주를 팔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미 업계에서 믿음이 컸던 그는 어렵지 않게 150여곳의 기관에 대량매매(블록딜) 형태로 모든 물량을 넘겼다. 문제는 다음날 발생했다. 간밤에 해당 증권사 홍콩법인에서 200억원가량의 손실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장 시작과 동시에 주가는 하한가로 급락했고 물량을 받았던 기관들은 거센 비난과 함께 거래중단을 통보했다.
김 대표는 "기관의 거래중단 통보를 업계에서는 속칭 '빠떼루'라고 한다"며 "당시 거래하던 전체 법인의 70% 이상에서 빠떼루를 당했으니 그때가 내 영업인생의 가장 큰 고난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김 대표의 끈기가 힘을 발휘하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기관을 일일이 방문하면서 진심으로 호소했다. 그는 "문전박대를 당하면 다음날 다시 찾아가고 쫓겨나면 다음날 또 찾아가 내가 정말 사고를 알고도 팔았겠느냐며 기관들을 설득했다"며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자신이 있는데 본의 아닌 사건으로 기회가 사라질 수 있다는 데서 오히려 끈기가 생겼다"고 덧붙였다.
LIG투자증권이 빠르게 자리잡을 수 있는 데는 직원들 간의 소통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김 대표가 있다. LIG투자증권 출범 당시 우리투자증권에서 김 대표와 같이 옮겨온 직원은 총 35명. 전체 인원의 70%가 김 대표를 따라나선 것이다. 그는 "아무 조건 없이 함께해준 직원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며 "파트별로 많은 경력을 가진 전문가들이 자리해 조직이 빨리 자리잡을 수 있었고 의사결정도 빨랐다"고 말했다.
김 대표가 직원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는 데는 업무능력뿐 아니라 인간적인 소통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우리는 조직이 작은 만큼 결속력이 높아야 한다"며 "직원들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서로 다른 부서와 다른 직급의 직원들을 모아 매달 호프데이를 갖고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눈다"고 말했다.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끈기 있는 사장, 직원들에게서 무한한 신뢰를 받는 사장. 이제 운전대를 잡은 지 6개월 남짓 된 수장이 LIG투자증권을 어디까지 이끌어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 김경규 대표는 |
리서치·채권영업 중심 특화…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조민규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