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은 그 명성만큼이나 수없이 많은 무대에 오른 고전 중의 고전이다. 그만큼 해석하는 방식도, 표현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 극단 미추의 '리어왕'은 지난 2008년 대한민국 연극대상의 대상 수상작으로,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시대 상황에 맞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는 7월에는 일본에서 열리는 제17회 베세토연극제에 한국대표작으로 초청돼 일본 무대에 오른다. 극중에서는 리어왕과 왕의 충직한 신하 글로스터로 대변되는 기성 세대가 가진 욕망과 파멸의 과정을 리어왕의 세 딸과 글로스터의 아들 에드먼드 같은 젊은 세대 역시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국 리어왕이 실성하고 글로스터가 눈을 잃고 세 딸 모두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자만심의 극치에서 배반을 당하고 끝도 모르게 추락해 모든 것을 잃게 된 순간에야 비로소 진실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리어왕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중년 배우 정태화의 선 굵은 연기와 야비하면서도 인간 군상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에드먼드(글로스터의 서자) 역의 정나진, 에드거(글로스터의 아들) 역의 조원종 등 남성 연기자들의 열정적인 연기가 볼 만했다. 특히 주목해 볼 것은 광대의 비중이다. 광대는 무대의 시작과 끝을 장식할 뿐아니라 비극적인 장면마다 등장해 극의 맥을 잇는다.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배반과 음모, 분노와 저주, 권력에 치인 리어왕의 비극을 속 시원히 풀어내는 역할을 한다. 광대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재기 넘치면서도 해학적인 대사는 관객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해준다. 조선시대 누각인 경회루를 응용해 만들었다는 고즈넉한 무대와 하얀 병풍을 이용한 동양적 감각도 인상적이었다. 중간 중간에 얇은 천을 덧대 만든 대형 대나무 발 여러 개가 공간을 분리하고 시간을 이동하면서 배우의 독백 무대로도 손색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동서양 연극에 고른 균형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 이병훈의 연출답게 한국적 전통을 살리면서도 셰익스피어의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잘 녹여냈다는 느낌이다. 오는 20일까지 명동예술극장.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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