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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의 만 알 사네아는 30여년 전 고사이비 가문의 사나 알 고사이비와 결혼했다. 하지만 지금은 돈 문제 때문에 처가집 사람들과 원수가 됐다. 언뜻 보면 평범한 이야기지만 이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고사이비 가문이 소유한 아하브 그룹과 사네아가 경영하고 있는 사드 그룹이 충돌하면서 사우디 금융권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아하브그룹은 철강파이프 제조, 펩시콜라 배급, 각종 금융서비스 등을 영위하는 사우디의 대표적인 기업이며, 사네아는 지난해 포춘이 세계 62위 부호로 선정한 인물이다. 23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현재 사네아의 자택 앞에는 몇 개월째 마분지 상자가 놓여있다. 고사이비 측에서 각종 고소장과 법원 소환장 등을 담아 보냈지만, 사네아가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방치된 것. 양측의 싸움은 지난 6월 고사이비 측이 사네아를 횡령 혐의로 고소하면서 시작됐다. 고사이비 가문은 고사이비의 환전 부문 계열사에서 일해오던 사네아가 1980년대에 창업한 부동산업체인 사드를 통해 수십억 달러를 빼돌렸다고 주장했다. 사네아는 이 같은 주장을 부정했지만, 고사이비 가문은 런던과 케이맨제도, 제네바 등지의 법원으로부터 사네아의 자산 동결을 승인받았고, 사우디 중앙은행도 양측이 국내은행들에 개설한 계좌를 동결했다. 이들의 다툼은 단순한 집안싸움을 넘어서 사우디 금융권과 몇몇 외국계 은행까지 흔들고 있다. 아하브그룹과 사드그룹이 각각 소유한 바레인 은행 2곳은 파산보호 절차에 들어갔다. 일부 현지 은행은 이미 울며 겨자먹기로 대출금 회수를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도이체방크, 코메르츠방크 등과 최소 세 곳의 현지 은행은 아하브ㆍ사드 그룹에 대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현지 및 외국계 은행 110여개가 최근 수년 간 양 가문에 빌려준 돈은 150억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양측의 갈등은 중동 족벌기업들의'비공개 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전에도 중동 기업들은 증시상장이나 신용평가사에 대한 장부 공개를 회피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아하브도 비공개주의를 고수하다 화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상장기업들도 투명성 측면에서 열악한 수준이기는 마찬가지다. 사우디에서 비(非)금융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상장기업인 사드는 지난 주 채권자인 씨티코프의 정보공개 요청을 무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씨티코프는 바레인 증권거래소를 통해 사드가 보유한 6억5,000만달러 규모의 이슬람채권 및 사드의 재정상황에 관련된 정보 공개를 요구하는 성명을 냈지만,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다. 사우디 금융권의 관행인 '이름 대출(name lending)'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름 대출이란 사우디의 현지 및 외국계 은행들이 대출자가 유력인사일 경우 서명만으로 대출을 해주는 관행을 뜻한다. 고사이비 측의 주장에 따르면 사네아는 수차례 고사이비 기업인들의 서명을 위조해 대출을 받았다. 고사이비는 이 같은 주장을 근거로 채권단의 대출금 92억 달러에 대한 상환 요청을 거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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