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와인의 성지 메독(Medoc)<br>"최고 등급 '그랑 크뤼'는 역사적 사건이자 기념물"<br>포도원 예약하면 양조장·창고 개방하고 시음 기회도
| 같은 포도밭에서 만든 와인이라도 해마다 맛과 품질이 다르다. 메독의 포토밭 전경 |
|
| 샤또 빨머의 숙성고에서 양조기술자가 오크통에 담긴 와인을 시음하는 모습
|
|
| 샤또 라뚜르의 스테인레스 양조통 |
|
프랑스 메독 뽀이약 지역에 위치한 '샤또 라뚜르'의 포도밭은 온통 자갈 투성이다. 자갈 크기도 메독 지역의 다른 포도밭보다 2배 이상 크다. 언뜻 봐서는 밭인지 황무지인지 헷갈릴 정도다. 척박해 보이는 땅이지만 포도나무는 녹색의 자태를 뽐내며 이제 막 작은 포도송이를 맺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 시간 얕은 언덕 위로 펼쳐진 포도밭에는 따가운 햇살이 맹렬하게 내려쬔다.
바로 이 자갈과 언덕, 그리고 햇살이 샤또 라뚜르를 전세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와인으로 만들어준 비결이다. 메마른 자갈밭에서는 포도나무가 물과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뿌리를 깊숙이 내려 다양한 영양분과 미네랄을 섭취한다. 따라서 와인 맛도 더욱 풍부해진다.
메독 지역에서는 자갈밭에 포도나무를 심고 자갈이 없는 비옥한 토양에는 포도 대신 옥수수를 키운다. 또 언덕 지역은 포도나무들이 햇살을 전체적으로 고르게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 같은 환경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샤또 라뚜르는 최고급 와인으로, 한 병 가격이 수백만원을 호가한다.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때 김정일 위원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대접했다고 해서, 또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200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만찬에 내놓았다고 해서 국내에서도 유명세를 탄 바로 그 와인이다.
프랑스 와인의 대표 산지인 보르도의 핵심 지역이 바로 메독이다. 메독 지방의 포도 재배면적은 1만6,500㏊, 전체 보르도 레드와인 포도 재배면적의 15%를 차지한다. 이 곳에서 와인을 만드는 생산자만 1,500곳에 달하며 연간 유통되는 와인은 1억병선이다.
메독 지역에는 메독(Medoc), 오메독(Haut-Medoc), 마고(Margaux), 물리스앙 메독(Moulis en Medoc), 리스트락 메독(Listrac-Medoc), 쌩쥘리엥(Saint-Julien), 뽀이약(Pauillac), 쌩떼스테프(Saint-Estephe) 등 총 8개의 와인 생산지가 있다. 이 지역들은 모두 원산지통제명칭(AOC)이 적용돼 엄격한 조건에 맞춰 생산된 와인들만 이들 지역명을 사용할 수 있다.
◆ 와인은 자연이 만든다
"와인을 만드는 건 자연이고 사람의 노력은 그 다음이다" 거대한 샤또(성)를 가진 명문가의 오너든, 부업으로 재미삼아 와인을 담그는 생산자든 와인을 만드는 철학에 대해 물으면 똑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특히 와인 생산자들이 와인을 만드는 필수요소로 강조하는 단어가 바로 '떼루아(Terroir)'다. 떼루아란 포도나무의 성장에 필요한 조건을 갖춘 여러 종류의 토양과 포도가 최상의 상태로 익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후조건을 뜻하는 말.
샤또 다가싹의 장 뤽 젤은 "떼루아는 와인의 첫 번째 필수조건이며 여기에 떼루아의 잠재력을 표출시켜주는 사람의 노력이 더해져야 좋은 와인이 나온다"고 말했다. 샤또 맨 라랑드의 베르나르 라띠그도 "와인의 품질을 결정하는 첫번째는 떼루아고 두 번째는 포도 품종의 마술, 세번째는 사람들의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한 병의 와인을 통해 '사람의 기술'보다 각 '지역의 개성'을 드러내려는 완고한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같은 포도밭에서 만든 와인이라도 해마다 맛과 품질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매년 포도의 숙성 정도를 결정하는 기후, 즉 떼루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곳 와인 생산자들은 특히 2008년을 매우 가슴 졸였던 해로 표현한다.
2008년에는 비가 많이 오고 날씨도 좋지 않아 와인 품질이 기대에 못 미칠 것으로 예상됐지만 포도 수확을 앞둔 9월에 갑자기 기온이 높아지고 바람도 많이 불어 포도가 잘 익을수 있는 환경으로 급변했다. 샤또 브란느 깡뜨낙의 앙리 루통은 "2008년산 와인은 달콤한 과일향이 나면서 탄탄한 구조가 느껴지는게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 150년 전통의 등급체계
메독 와인은 특유의 등급 체계로도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등급인 '그랑 크뤼(Grand Crus)'는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나폴레옹 3세가 보르도 와인의 등급을 분류하도록 지시해 만들어졌다. 당시 그랑 크뤼 등급으로 분류된 61개의 와인 중 60개가 메독 와인이다.
샤또 라뚜르를 비롯, 샤또 마고, 샤또 라피트 로칠드, 샤또 오브리옹 등 4개 와인이 1등급으로 분류된 것도 이 때다. 1~5등급으로 구분된 그랑 크뤼 등급은 1973년 샤또 무통 로칠드가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승격된 게 유일한 변화다. 1등급으로 승급된 샤또 무통 로칠드까지 합쳐 '보르도 5대 와인'으로 불린다.
그랑 크뤼 등급은 분류된지 150년의 세월이 흘러 각 와인의 현재 품질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지적되기도 하지만 그대로 존중돼야 한다는 게 이곳 와인업자들의 생각이다. 그랑 크뤼 와인에 필적하는 품질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 샤또 쏘시앙도 말레의 장 고트로는 "그랑 크뤼 등급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자 기념물의 의미"라며 "지금 굳게 닫힌 그랑 크뤼 등급의 빗장이 열린다면 가치가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855 보르도 등급의 역사'의 저자인 와인 전문가 디위 마캄은 "지금은 상점이 정한 와인 가격이 곧 등급"이라며 "수요가 많은 와인일수록 가격이 오르므로 매년 가격에 의해 등급이 다시 매겨진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와인숍에서는 4, 5등급 와인이면서 2, 3등급 와인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팔리는 와인들이 많다.
메독 지역에는 그랑 크뤼 등급 외에도 '크뤼 부르주아(Crus Bourgeois)' 등급과 '장인의 와인'인 '크뤼 아르티장(Crus Artisans)' 등급 등도 있다.
◆ 볼거리ㆍ즐길거리도 풍부
메독은 와인 애호가에게 '성지' 같은 곳이지만 다른 볼거리와 즐길거리도 많다. 포도원들은 미리 예약만 하면 와인창고와 양조장을 둘러보게 해주고 와인도 시음하게 해준다. 근사한 샤또에서 숙박도 가능하다.
지롱드강이 내려다보이는 핑크빛 건물의 샤또 루덴, 객실마다 개성이 묻어나는 샤또 맨 라랑드 등이 있다. 마고에 있는 4성급 호텔인 '를레 드 마고'에서는 골프와 스파도 즐길 수 있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도 눈에 띈다. 샤또 랭슈 바즈는 포도원 인근에 빵집, 커피숍, 와인숍, 식당, 옷가게, 놀이터 등이 들어선 '바즈 마을'을 조성했다. 샤또 랭슈 바즈의 장 미셸 까즈 회장은 "와인 산업 자체도 관광객 유치가 중요하다"며 "내년 9월 열리는 메독 마라톤에 맞춰 와인과 만화를 주제로 한 행사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르도 시내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라 와이너리'는 현대적 개념의 와인 콤플렉스다. 현대미술 작품이 곳곳에 설치돼 있으며 와인숍과 레스토랑, 공연장 등도 함께 갖추고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