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 도안 석곡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면서 독립운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청년외교단의 외교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의 연계활동을 위해 지난 1919년 말 북간도에 근거를 둔 대한정의단군정사에 합류했다.
'외교시보'를 발행해 국내 인사들에게 내외정세 동향을 알렸고 1920년 '독립신문'에 '독립기념일의 말'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투철한 독립정신과 강인한 실천을 주장했다.
1922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한인사회의 대동단결을 고취하고 청년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1923년 베이징대에 입학해 중국 항일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한중 연합체인 동서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 이후 1925년 말 만주로 건너가 신민부에 참가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국제공산당 조직으로부터 군자금을 확보하는 일을 맡아 독립군 양성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29년 무렵에는 난징으로 옮겨 한국혁명당 결성에 참가했다. 1932년에는 한국광복동지회·조선혁명당·의열단·한국독립당 등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추진했다. 1937년 초 친일파인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저격사건으로 상하이에서 체포돼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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