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인식은 상당히 시각적이고 즉물적이다. 동서남북 사방위가 있고 위아래 상하를 합해 육합(六合)이라 불렀고 이러한 육면체적 공간으로 우리가 사는 우주의 모양을 시각화해왔다. 공간의 짝인 시간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어떤 인식과 모양을 만들려고 했던 것일까.
시간을 부여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천체다.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이 우리에게 시간을 부여하고 삶의 리듬을 만든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인류는 해와 달의 움직임을 관측해 시간의 과학인 역법을 발달시켜 왔다. 태양이 아침에 떠오르고 다시 떠오를 때까지는 하루이고 해 그림자가 가장 짧은 동지로부터 다시 동지가 되풀이되는 기간은 1년이고 달이 만월인 데에서 다시 만월이 되기까지는 한 달로 불렀다. 이리해 시간을 구성하는 기본 마디인 1년·1월·1일이 생성됐으며 이들 시간요소는 모두가 해와 달을 시각화한 상상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간의 흐름을 '연월'이라 하지 않고 '세월'이라 한다. 세(歲)는 흔히 1년의 다른 말로 알고 있지만 이 말이 처음 나오던 기원전 4세기 무렵에는 목성이 우주공간을 1년 치 간 만큼의 거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전국시대 제나라에서 오행사상을 생성하기 이전에는 육안으로 관찰된 다섯 행성의 이름을 각기 세성(목성)·형혹성(화성)·전성(토성)·태백성(금성)·진성(수성)이라 불렀던 바와 같이 세성은 목성의 다른 이름이다.
당시 목성의 공전주기는 12년으로 측정(실제로는 11.86년)돼 그 12년을 하나의 시간마디로 삼는 1기(紀)라는 말이 생겨났다. 발해국왕 대이진(831-857)이 842년 3월1일 일본왕에게 보낸 외교서신에는 '지금 하늘의 별자리가 운행해 12년이 지났으므로 찾아뵙는 예를 갖춘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 다른 859년 5월10일 서신에서는 이를 별이 순환하는 주기라는 뜻의 성기(星紀)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고대인들은 잡히지 않는 하늘에다 12년의 시간마디를 부여했으니 이 또한 시간의 상상력이 엮어낸 문화라 하겠다. 우리가 해마다 쥐띠·소띠 하는 12가지 띠 문화가 생긴 것도 모두 목성의 시간마디가 가져다준 상상력의 결과다. 고대 로마 이래 유럽의 달력이 1년 동안의 시간마디에 물고기자리·양자리 등 열두 조디악(獸帶)을 엮은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서양 천문학이 만든 12궁 별자리가 태양의 길인 황도대를 따라가는 요소이며 1년이란 시간길이를 지닌다면 동양 천문학에서 개발한 12띠 문화는 목성의 길에다 만든 시간의 이정표이며 12년간의 시간길이를 가진다. 두 문화가 비슷하지만 근원이 전혀 다른 시간문화사를 엮어낸 것이다. 년(年)은 태양이 일주천하는 것이고 세(歲)는 목성이 일주천하는 의미이다.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몇 번의 성기를 지나갈 것인가. 목성이 5번 돌면 60년이고 이를 기리는 민속이 바로 회갑연이다. 6번 돌면 72년이고 7번이면 84년이니 더욱 귀한 수연례로 기려야 할 것이다. 이런 문화 기반으로 인해 우리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연월'이라 하지 않고 '세월'이 간다고 한 것일 터이다. 이를 발해인들이 성기라 불렀듯이 우리는 모두 별에서 나와 별로 돌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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