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조원. 고령화로 생명보험사들이 추가로 부담할 돈이다. 개인연금보험을 팔 때 예상수명(87.2세)보다 실제수명(97.4세)이 늘어나기 때문. 전체 보험판매의 41.0%를 차지하는 개인연금에서 거액 적자가 발생하면 치명적인 경영난이 불가피하다. 한국은행은 금융안정보고서를 통해 책임준비금 적립 등 대책을 주문했다. 고령화 시대의 그늘로 접어든 한국 경제에 패인 또 하나의 주름살임에 틀림없다.
△출산율이 갑자기 높아지지 않은 한 고령화는 피할 수 없는 재앙이다. 세계에서 노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한국의 미래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친 채 노인들로 가득한 시골과 다름 아니다. 영국 시인 T.S.엘리엇의 황무지(1922년)에 등장하는 쿠마의 무녀(巫女)는 아무런 의욕도 희망도 없는 고령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젊고 아름다웠던 무녀는 소원을 빌 때 무병(無病)을 깜박 잊고 장수(長壽)를 원해 세월 속에 육체가 쪼그라들어 조롱 속에서 죽기만을 바라며 무한하고 괴로운 생명을 이어나간다.
△일본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에서 척박한 산골에 사는 어머니는 나이 들어 힘이 떨어지자 돌을 들어 앞 이빨을 부순다. 아들이 노모를 업고 울며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혼자 내려오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1983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끈질긴 생명력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지만 1999년 한국에서 방영됐을 때 다른 논란을 낳았다. 네티즌들은 고려장(高麗葬)은 일제가 한국을 비하하려고 꾸민 왜곡이며 실제로는 일본에서 성행한 증거가 바로 이 영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올해 초 일본의 아소 다로 부총리가 "죽고 싶어하는 노인은 얼른 죽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내뱉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고려장 풍속의 발현이라는 것. 과연 나이 든 노인을 버리는 '기로( 棄老)'행위는 어디 풍속일까. 전세계 공통의 유산이다. 중국과 중동, 유럽에서도 기로전설이 퍼져 있다. 우리는 정말 자유로울까. 부의금만 챙기고 모친의 시신을 병원에 방치한 채 종적을 감춘 세 자매의 행방을 경찰이 쫓고 있다. 현대판 고려장,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우리네 현주소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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