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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라니… 한없이 참담해진 일본
[R의 공포를 넘어라] 글로벌 위기 현장을 가다 ⑤ 일본
도쿄=신경립기자 klsin@sed.co.kr
일본 여름세일 기간의 마지막 주말을 맞아 도쿄의 주요 백화점과 명품매장들이 들어선 긴자거리에 쇼핑객들이 오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지갑을 여는 소비자는 많지 않아 주요 백화점들의 여름세일 매출액은 지난해에 비해 감소세를 나타냈다. /도쿄=신경립기자
"월급 줄어 지갑 열기 겁나… 쇼핑은 유니클로에서 하죠"
잘 나가던 점포 권리금 1억엔서 300만엔으로 뚝… 백화점엔 중국 관광객만
20년간 장기 디플레에 중산층 붕괴·빈부격차 심화
엔고·높은 법인세율 등 기업은 6중고에 시달려
지난 7월의 마지막 주말, 폭염의 와중에도 일본 도쿄의 대표적 번화가인 긴자(銀座) 거리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여름 정기세일이 진행되는 마지막 주말이다 보니 미쓰코시 등 대형 백화점 매장은 정가의 50~70%까지 값을 내린 세일 물품을 둘러보려는 손님들의 분주한 발길이 이어졌다. 길가에 큼직하게 자리잡은 명품 브랜드 샤넬의 플래그십 스토어 입구에는 열명 남짓한 대기자들이 부채질을 하면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1년 전 대지진과 원전사고의 충격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했던 도쿄를 찾았을 당시의 침울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거리는 예전의 활기를 되찾은 듯했다.
하지만 한동안 지켜보니 쇼핑백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주말이라 차량이 통제된 긴자 중앙도로 중간중간에 비치된 파라솔 테이블에 쇼핑백을 올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부인과 함께 빈 손으로 프랭탕백화점 문을 나선 기무라 료(31)씨는 "더워서 잠시 땀을 식힐 겸 백화점 잡화매장을 둘러보고 나왔지만 물건을 살 생각은 아니었다"며 "쇼핑은 근처 유니클로(일본의 저가 의류 브랜드)에서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며칠 뒤 미쓰코시이세탄을 비롯한 일본의 대형 백화점들은 올 여름세일 매출액이 전년동기 대비 2.6~5.1%가량 줄었다고 발표했다.
20년 동안 지속된 장기 디플레이션으로 식어버린 일본경제의 온도는 쉽게 올라가지 않고 있다. 지난해 대지진 이후 정부가 수조엔 규모의 부흥예산을 쏟아 붓고 있는 덕에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4분기 연속 플러스를 나타내고 있지만 일본인들이 체감하는 경기는 지금도 꾸준히 내리막이다. 1900년대 초반부터 도쿄 쓰키지 어시장 인근에서 5대째 스시집을 운영하는 스기야마씨는 "모든 자영업자들이 마찬가지겠지만 경기가 십여년째 계속 안 좋아지고 있는 것 같다"며 "한창 경기가 좋았을 때 쓰키지 어시장의 점포권리금은 1억엔이 넘었는데 지금은 300만엔 수준"이라고 전했다.
1980년대 거품경기 붕괴로 자산가격이 폭락하면서 시작된 일본의 디플레이션은 정부의 정책실패와 산업 구조조정 지연, 엔고, 그리고 급진전된 저출산 고령화 추세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 올해까지 2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1996~1997년과 2000대 중반에 두 차례 찾아온 경기회복 기회는 정책실패와 정치 혼란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장기화하는 불황의 와중에 중산층은 무너지고 빈부격차도 심화했다. 후생노동성 집계에 따르면 일본의 기초생활수급자 수준은 2006년까지만 해도 20만명을 조금 넘어서는 수준이었으나 올 3월 210만8,000명을 넘어서며 사상최대 규모로 불어났다.
한편 경제역군인 일반 직장인들의 살림도 눈에 띄게 팍팍해졌다. 일본 국세청이 매년 실시하는 민간급여실태조사에 따르면 2000년 봉급생활자들의 평균 연간 급여는 461만엔에 달했지만 10년이 지난 2010년에는 412만엔으로 8.7%나 줄어들었다.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의 나가하마 도시히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디플레이션으로 생활물가가 떨어진 이상으로 임금이 줄어 소비가 정체되고 물가는 더욱 하락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경제주간 다이아몬드지의 자체 분석에 따르면 일본 40세 남성의 평균 연봉은 2000년 640만엔 수준에서 2010년 580만엔 안팎으로 뒷걸음질쳤다. 지금 일본에서 그나마 소비를 떠받치는 것은 고도성장의 수혜와 풍족한 연금소득을 누리는 고령자들뿐이다.
가계소득 감소는 곧 내수경기 위축과 기업실적 악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엔고, 높은 법인세율, 전력부족, 환경과 노동 규제, 자유무역협정(FTA) 지연 등 이른바 '6중고'에 시달리는 일본 기업들이 국내를 떠나 해외시장에서 성장동력을 모색한다고 하지만 국내의 동력이 꺼져가는 상황에서 일본 기업들의 온전한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나가하마 이코노미스트는 "정부는 물가목표 1%를 내걸고 있지만 지금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돈을 풀고 기업활동을 일본 국내로 되돌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전에는 지속적으로 인플레이션 타깃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며 "애당초 디플레이션에 빠진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올 들어 한국에서도 물가하락을 동반한 경기침체 우려가 고조되는 가운데 디플레이션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일본의 이 같은 실상은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일본 정부는 2013회계연도에 일본경제가 2% 가까운 명목성장률을 기록하면서 16년 만에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날 기회를 맞게 된다는 기대를 내비치고 있지만 전문가들이 그리는 일본경제의 미래는 지속되는 디플레이션과 1% 안팎의 저성장이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아오야마가쿠인대 교수는 내년 경제성장률이 정부 예측보다 낮은 1.5% 수준에 그칠 것이라며 "인구가 고령화하고 경제가 성숙단계에 들어선 일본에서 1% 전후의 성장률은 이제 당연한 것이 됐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부진한 지표보다 더 큰 문제는 불황에 익숙해진 일본인들의 의식변화다. 일본 재계단체인 게이단렌의 네모토 가쓰노리 산업정책본부장은 "불황이 시작된 후 취업한 40대 중반 이전 세대에게는 '경제성장'이라는 개념이 서 있지 않다"며 "성장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하면 성장이 가능한지 모르는 세대가 경제활동의 주역이 되는 상황에서 밝은 미래는 그리기 어렵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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