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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서거] 홀로 남은 이희호 여사

후견인·조언자로 '평생동지'<br>마지막까지 지극정성 간병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인생의 반려자였던 부인 이희호(88) 여사는 18일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홀로 남아 쓸쓸한 여생을 맞게 됐다. 이 여사에게는 김 전 대통령의 빈자리가 커 남편을 잃은 슬픔이 그 누구보다 크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김 전 대통령과 인생의 고락을 같이해왔기 때문이다. 이 여사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37일간 병상을 지키면서 지극정성으로 간병하는 한편 줄을 이은 문병인사들을 맞았다. 특히 투병 중인 김 전 대통령의 혈압이 떨어지자 한땀 한땀 손수 뜬 이른바 ‘눈물의 털 장갑ㆍ양말’을 남편의 손과 발에 끼워줘 주변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 여사는 지난 1970년대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부터 목도리와 장갑을 떠서 마음을 전하고는 했다. 김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 대문에는 ‘김대중’ ‘이희호’라고 쓰인 문패가 나란히 걸려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에서 “문패는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라며 “이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의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고 적었다. 유복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이 여사는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당시에는 드물게 미국에서 유학까지 한 엘리트 여성운동가였다. 이 여사가 2년 연하의 김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난 것은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였다. 당시 전쟁 통에 지인의 소개로 몇 차례 대면했던 이 여사는 10년 뒤 첫 부인과 사별한 김 전 대통령을 우연히 다시 만나 1962년 운명적인 결혼에 이르게 된다. 이 여사 스스로 ‘꿈이 큰 남자의 밑거름이 되자고 결심하고 선택한 결혼’이라고 밝혔듯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는 옥바라지로, 미국 망명 때는 후견인으로, 가택연금 때는 동지로, 야당 총재 시절에는 조언자로 정치 역정을 함께했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는 지미 카터 미 대통령에게 구명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국제사회를 향해 구명운동을 벌였고 각종선거 때는 전국을 누비며 헌신적으로 지원유세에 나섰다. 특히 청와대의 안주인이 된 뒤에는 여성과 아동 인권 신장에 힘썼다. 당시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의 공직 진출이 확대되자 ‘국민의 정부 여성정책 뒤에는 이희호가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 정상에 오른 뒤에도 시련은 계속됐다. 바로 ‘홍삼 트리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아들들의 비리 문제였다. 이 여사는 2002년 자신의 유일한 친자인 3남 홍걸씨에 이어 차남 홍업씨도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 등으로 잇따라 구속되는 참담함을 맛봐야 했다. 이 여사는 이때가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보다 더 힘들었던 시기라고 했다. 이 여사는 당시 “내가 죄인”이라며 가슴을 쳤고 김 전 대통령의 건강은 이때부터 급속히 쇠약해졌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퇴임 후에도 늘 공식석상에 남편과 함께 했다. 2007년 재보선과 2008년 총선에서 차남 홍업씨를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지원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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