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이 은행권 구제금융 신청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은 더 이상 자력으로 금융 부실을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독일ㆍ네덜란드 등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국가들이 잇따라 구제금융을 제안하고 국제신용평가사인 피치와 국제통화기금(IMF)까지 은행권 부실의 심각성을 경고하자 결국 외부 수혈을 받기로 결정한 것이다.
특히 이번 구제금융은 국가 차원이 아닌 은행권에 제한되는 것으로 추가적인 긴축 등의 요구 조건도 없어 스페인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평가되고 있다.
◇"외부 수혈 받아라" 압력에 입장 선회=루이스 데 긴도스 스페인 재무장관의 9일(현지시간) 구제금융 신청 발표는 IMF가 스페인 금융권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를 발표한 직후 나왔다. 전날 IMF는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스페인 은행권이 심각한 금융쇼크를 피하려면 최소 400억유로의 신규 자금이 필요하며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이의 1.5~2배 정도의 자금이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피치도 지난 7일 "스페인 은행 부문의 구조조정 및 자본 재확충 비용이 6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며 최악의 경우 1,000억유로가 될 수 있다"고 밝히면서 스페인의 장기 국가신용등급을 3단계 강등했다.
유로존 국가들이 지금까지의 구제금융 관행과 달리 스페인에 대해서는 은행권에 한해 구제금융을 지원하고 긴축 강화 등을 요구하지 않겠다며 '당근'을 제시한 것도 그동안 "구제금융은 없다"고 버티던 스페인의 마음을 돌리게 만들었다. 유로존 4위의 경제대국인 스페인 위기가 현실화할 경우 유로존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스페인이 이 같은 상황을 이용해 자국에 유리하도록 '벼랑 끝 전술'을 펼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7일 "다른 유로존 국가들과 (스페인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어떤 일이라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얀케이스더 야허르 네덜란드 재무장관은 "스페인이 원할 경우 유럽안정화기구(ESM)의 대출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9일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에서는 스페인 은행권에 최대 1,000억유로를 ESM이나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을 통해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스페인 정부는 민간 컨설팅업체에 의뢰한 자국 은행권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가 나오는 오는 21일 이후 구체적인 금액 및 시기 등을 정해 구제금융을 공식적으로 신청할 계획이다.
◇은행 부실로 국가경제 '흔들'…구제금융이 잠재울까=스페인은 2007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주택담보대출 연체가 급증해 은행권의 부실채권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3월 현재 은행 부실채권 규모는 전체 여신의 8.37%로 1994년 8월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이 때문에 신용평가사들은 스페인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무더기 강등하기도 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스페인 정부는 자산 3위 은행인 방키아를 국유화하는 등 은행권 구조조정에 나섰다. 하지만 은행권 부실이 예상보다 심각해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을 자체적으로 조달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스페인의 총 공공부채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어 국채 발행 금리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구제금융 신청 마지노선인 7%에 근접했고 국가 채무불이행(디폴트) 위험을 나타내는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 5년물 프리미엄은 3일 600bp(1bp=0.01%P)를 뛰어넘는 등 사상 최고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스페인 경제에 대한 우려로 스페인에서 빠져나가는 외국인들의 발길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지난 1ㆍ4분기 스페인 자본시장에서는 국내총생산(GDP)의 10%에 달하는 970억유로의 자금이 빠져나가면서 가뜩이나 돈줄이 말라붙은 스페인의 목을 조였다. 스페인 은행지원기금(FROB)에 남은 돈이 53억유로에 불과하다는 관측도 나왔다.
결국 외부 도움이 필요없다며 고집을 부리던 스페인은 이번에 유로존의 구제금융 도움을 받아 급한 불을 끄기로 했다. 일단 유로존으로부터 받은 자금은 방키아 국유화 작업 및 부실이 심각한 저축은행 등에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은행권 부실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어 추가적인 구제금융이 필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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