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예술을 동경하는 할리우드 소설가 길 펜더(오웬 윌슨)에게 파리는 그야말로 마음 속의 축제가 벌어지는 곳이다. 고즈넉한 파리의 정취는 예술적 영감을 자극한다. 그러나 지극히 현실적이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그의 약혼녀 이네즈(레이첼 맥아담스)에게는 그저 잠시 머물러 가는 여행지일 뿐. 함께 낭만의 공간을 두 발로 내디뎠지만 둘의 생각은 평행선을 달린다. 약혼녀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지며 우울한 감정에 휩싸인 길은 살짝 취기가 오른 상태로 홀로 프랑스 밤 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몽환적인 느낌이 그의 주변을 한껏 사로잡은 그 때,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길의 앞에 1920년대 풍 클래식 푸조 자동차가 나타난다. 얼떨결에 올라탄 푸조, 이윽고 길 펜더는 한 파티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 낯선 이들에 이끌려 다다른 그곳에서 길 펜더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만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조우한다.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초현실주의 화가로 평가 받는 살바도르 달리,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 천재적 화가 파블로 피카소, 여류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 등 그가 평소 꿈꿔왔던 이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길은 더할 나위 없는 황홀경에 빠진다. 길 펜더는 매일 밤 자정, 자신을 1920년대 황금시대로 이끄는 그 시간, 시간여행의 자동차를 기다린다. 현실은 부정하고 강한 노스탤지어에 휩싸이게 된다.
지난해 칸 국제 영화제 개막작 '미드 나잇 인 파리'는 노장 우디 앨런 감독의 41번째 작품이다. 앨런 감독은 극 중 길 펜더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예술가라면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환상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예술가들에게 과거는 큰 마력이 있다. 예술이 한창 꽃 피웠던 황금 시대로 돌아간다는 것, 그곳에서 당대를 살았던 예술가들과 음악을 논하고, 미술을 논하는 짜릿한 맛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러나 앨런 감독은 끝없는 과거에 대한 동경, 노스탤지어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1920년대에서 1890년대로 한 번 더 시간여행을 떠난 길은 그곳에서 만난 화가 고갱과 드가 등이 르네상스 시대를 부러워하는 것을 엿보게 된다. 길은 이내 깨닫게 된다. 마음 한 켠의 욕망과 환상이 눈 앞에 현실이 돼 펼쳐지지만 예술가는 또 다른 황금 시대를 갈망하게 된다고.
일흔 일곱의 감독 우디 앨런이 관객을 낭만의 공간인 파리로 초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도 살맛 나는 세상, 머물지 않는 시대에 대한 막연한 동경보다 현재를 뜨겁게 사랑하라' 앨런 식 특유의 재치와 유머로 그는 그렇게 조용히 읊조린다. Let's do it, let's fall in love. 상영 중. 94분.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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