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ㆍ미 FTA 체결이 성사되면 국내 섬유산업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다만 아무리 좋은 기회가 온다 해도 이를 잘 살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들의 노력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어느 때보다 충실한 준비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섬유센터 빌딩(강남구 대치동) 회장실에서 만난 경세호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은 2시간에 걸친 인터뷰 동안 “한ㆍ미 FTA협상은 국내 섬유업계에게 기회를 주는 것일 뿐 무조건적인 수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안일한 자세를 버려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한국 섬유산업의 수장이자 산 증인인 경세호 회장(지난 57년 대학을 졸업한 후 50년 동안 줄곧 한 우물을 파고 있음)을 만나보았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경쟁대상을 이웃하고 있습니다. ‘한국 섬유’가 앞으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경세호 회장은 이 질문을 받자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모습이었다) 그런 질문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지금부터가 관건입니다. 지난 90년대 들어 우리나라는 장치산업에 대한 투자보다 복지 증진 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인건비가 상승하고 덩달아 경쟁력이 약해지는 길을 걸었습니다. 단순 비교지만 지금 시점에서 중국의 인건비 수준과 국내 인건비 수준만을 놓고 볼 때 한국은 중국보다 20배 이상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조건이군요. 어찌 보면 경합 자체를 거론하는 것이 난센스라는 느낌도 들고요. ▦무작정 비관할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고도 부가가치를 만들 여지는 충분합니다. 해외에선 여전히 ‘메이드 인 코리아’ 섬유, 의류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프리미엄을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이 같은 프리미엄을 얼마나 더 높이느냐에 달렸습니다. 디자인 부문과 마케팅, 기술 등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이뤄진다면 희망이 보이겠지요. 아쉽게도 우리 섬유산업은 이 같은 경쟁요소 또는 부가가치를 높일 요소들에 대해 다소 소홀했다는 점이지요.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국내 섬유산업이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평가하십니까. ▦개인적으로 상당히 높다고 봅니다. (이 대목에서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국내 섬유산업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원료에서 제품생산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균형이 잘 잡힌 산업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지난 30~40년 동안 해외 시장을 개척해온 만큼 마케팅 능력을 끌어올릴 잠재력도 무한하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각이 뛰어나서 (섬유산업이) 언제든지 비상할 수 있는 토양은 갖추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인력 공급도 원활하고요. 다만 이 같은 업스트림과 다운스티림 간의 유기적인 협력 체제가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 현 시점에선 걸림돌입니다. 이 부문들을 잘 연계시키고 한국인의 천부적인 미적 감각을 산업에 접목시킨다면 국내 섬유산업은 언제든지 폭발적인 성장을 할 것이라고 낙관합니다. 더 바란다면 ITㆍBT 연관 산업을 신소재 개발과 디자인 개발로 연계, 발전시켰으면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세계 1위 섬유산업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경 회장의 이 같은 판단은 낙관적인 요소만을 조합한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현재 진행중인 한ㆍ미 FTA 협상에서 양국이 개성공단 문제(생산지 표기를 한국산으로 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서로 상반된 입장입니다만. ▦그 문제는 정부차원에서 정리하고 있으므로 제가 나서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것이 모양상 좋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받으려고만 하는 자세보다는 미국에도 줄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윈-윈하는 관계를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첨단 신소재를 우선적으로 들여와 이를 바탕으로 경쟁력 있는 상품을 생산하는 ‘국제 라인’을 구축한다면 한ㆍ미 FTA협상은 양국 모두에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고 봅니다. 여담이지만 개성공단을 수 차례 오가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지리적ㆍ문화적ㆍ정치적 장벽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휴전선을 지나면서 과연 지구상에 이처럼 살벌한 곳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하지만 현지의 근로자들이 우리와 비슷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아주 매력적인 곳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현지 근로자의 업무숙련도 역시 기대치 이상입니다. 협회 입장에선 개성공단 문제가 한ㆍ미 양국 모두 바람직한 선에서 타결되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다시 포인트를 원점으로 돌려보지요. 섬유업계가 중국 등을 떨치고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선 말 그대로 ‘자발적인 산업합리화 노력’등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습니다만. ▦구조혁신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일본과 유럽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했습니다. 해법은 민간 주도 또는 정부 주도의 구조개선협회를 신설해 자체적인 구조조정을 위한 숨통을 열어주는 방식을 취했지요. 예를 들어 설비 구조조정을 앞둔 회사가 있다면 시장 충격을 줄이기 위해 적절한 가격에 이를 인수해 처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구조조정은 재투자를 위한 구조조정이 아니라 돈을 받고 빠져나가기 위해 부동산을 매각하거나, 공장 부지에 아파트를 건설하는 등의 왜곡된 구조조정을 보였습니다. 수지타산이 맞는 기업들은 저가 제품을 만들어서 결국엔 우량 기업을 위협하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모든 기업들이 위협을 받는 악순환의 고리가 얽혀있지요. 우리도 정부가 지원하고 민간이 주도하는 구조조정을 위한 협의체를 설립해 이 같은 원가 이하의 가격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의 설비를 사들여 적절하게 안배할 수 있는 시스템 정착이 필요한 때입니다. -국내 섬유산업이 제2의 르네상스를 맞기 위해선 복합처방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장시간 할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섬유산업 르네상스 “동대문에 해법있다”
“年5,000명 대졸 고급인력 동대문 ‘가능성’과 연결땐 세계적 명품기지 발전할것”
정부 복합적 지원 강력 촉구 "일본기업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다 보면 '부인들 대부분이 일년에 한두 번씩 한국을 반드시 여행한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동대문시장을 방문하기 위해서'라고 말해 주더라고요." 경세호 회장은 동대문시장의 발전가능성에 대해 매우 희망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에 더 좋은 물건들이 많은데 부인들이 왜 동대문까지 오느냐고 했더니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너무 괜찮은 제품들이 널려있기 때문'이라고 답해줍디다." 경 회장은 이 때문에 정부가 제대로 지원만 해주면 동대문을 세계적인 명품 의류 생산ㆍ판매의 홈타운으로 육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눈치다. 인력문제를 거론했더니 곧바로 반론이 나왔다. "섬유ㆍ패션을 공부한 대졸 고급인력들이 매년 5,000명씩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이탈리아에서 수학한 재원들도 상당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 많이 눈에 띕니다." 동대문의 가능성과 매년 사회로 진출하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묶어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이야기다. "현재 한국에서 양성되는 인력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신규 인력과 비교할 때 경쟁력면에서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섬유산업이 안고 있는 문제는 이들의 이 같은 높은 재능과 자질을 섬유산업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경 회장이 생각하는 동대문 육성 청사진의 키 포인트(Key Point)는 정부의 복합적인 지원. "단순하게 취업을 알선한다던가, 창업자금을 지원하는 형태로는 시너지 효과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정부와 국내 섬유업계가 동대문시장을 어떻게 지원하고 활용할지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습니다." 동대문을 한국 섬유산업 르네상스의 또 다른 기폭제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경 회장의 구상을 정부가 얼마나 귀담아 들어줄지 지켜볼 필요가 생겼다. ‘+α’ 만들자
수출품 포장박스도 매출에 영향…한가지는 더 잘해야 中·日앞서 지난 80년 초. 경세호 당시 원미섬유 사장은 미국 콜로라도행에 몸을 실었다. 주요 거래처인 맨해튼 셔츠사의 물류 공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원미섬유는 당시 맨해튼 셔츠로부터 생산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해 국내에서 처음 드레스 셔츠를 생산했다. 국내 매출은 꾸준히 오르는데 미국으로 OEM 방식으로 역수출하는 물량이 항상 제자리 걸음을 해 문제점이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미국 물류센터에 찾아가 보니 현장 직원들이 우리가 만들어 보낸 드레스 셔츠를 한쪽 구석에 밀어놓은 모습을 봤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더니 '다루기 좋은 것부터 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아차 싶었습니다." 기껏 만들었지만 물류의 통로에서 막힘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 질 좋은 셔츠야 박스 안에 들어있으니 알 수 없고, 포장상태가 양호한 제품들이 우대하고 있었던 것. 한국으로 돌아온 경 사장은 우선 박스 포장을 단단하게 다시 디자인했다. 미국으로 수출되는 과정에서 박스가 찌그러지면 공급통로에서 정체된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포장만 바꾼 것이 아니라 와이셔츠 깃에 다림질을 한 번 더해 누가 봐도 단정한 상태로 만들어 수출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 다른 나라에서 생산되는 제품보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OEM 방식의 셔츠는 불티나듯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미 맨해튼사 역시 한국에서 생산되는 품질 좋은 셔츠를 납품 받아 판매가 덩달아 늘어났다. 미 맨해튼사는 경 사장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담아 공로상을 수여했다. 경세호 회장은 지금도 25년 전의 콜로라도 물류센터 방문 경험을 되새기곤 한다. "남들보다 한가지를 더할 수 있어야 앞서 나갈 수 있다. 가까운 중국 시장과 일본 시장을 바탕으로 한국의 디자인과 마케팅력을 강화해 나간다면 섬유산업의 미래를 다시 그려나갈 수 있다." 드레스 셔츠 수출 대박의 숨은 경쟁력이었던 '견고한 포장박스와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 깃'처럼 한국 섬유산업은 새로운 노하우 축적에 보다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고 경 회장은 강조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